녹색순례 <동백꽃 다시 핀다> 네 번째 이야기: 끝나지 않은 싸움

2018.04.12 | 녹색순례-2018

녹색연합은 1998년부터 봄이 되면, 배낭을 메고 온 몸을 자연에 의지한 채, 열흘간 도보순례를 떠납니다.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이 땅의 아픈 곳, 그 신음 소리를 들으며 대안과 공존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제주 4.3 70주년인 올해는 ‘동백꽃 다시 핀다’라는 주제로 제주 전역의 4.3 유적지와 분쟁 지역을 걷습니다. 4.3 평화공원을 시작으로 북촌, 우도, 성산, 남원 그리고 강정과 송악산을 지나 한라산을 넘는 코스입니다. 순례는 4월 3일부터 4월 12일까지 9박 10일간 진행되고, 다섯 번의 기사를 연재합니다.

녹색순례 여덟째 날 오전 7시. 하루의 시작을 제주 해군기지 앞 생명평화 100배로 시작한다.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한 강정 주민과 지킴이들에게 생명평화 100배, 생명평화 미사, 평화의 인간 띠잇기는 매일의 일상이다. 2007년 제주도 서귀포시 최남단 작은 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되면서 강정에서는 생명과 평화를 부르짖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오랜 시간 친족이 함께 살며 ‘제삿날이면 다음날 아침까지 서로 집을 살피며 음식을 돌리곤 했다’는 어르신들의 말처럼 정이 넘치는 마을이었던 강정. 2007년 4월 26일 해군기지 유치 신청은 이 마을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200여 개가 넘는 자생단체들은 해군기지 싸움과 함께 찬반 갈등으로 깨어졌고, 10년이 넘는 싸움은 마을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구럼비가 파괴되고 연산호가 죽어가고 있다. 안보와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했던 아픔은 ‘국가 폭력에 의해 자행된 공동체 파괴와 강요된 희생’이라는 점에서 70년 전 4.3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녹색연합

강정을 뒤로 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진지가 남아있는 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으로 향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은 마치 그 당시 제주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국내 최남단 섬인 마라도와 가파도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보니 깎아지른 절벽 밑을 따라 작은 굴들이 보였다.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한 ‘인간어뢰’라고 불리는 가이텐 기지 구축 흔적이었다.

ⓒ녹색연합

길을 따라 곳곳에 동굴 진지가 만들어져 있었고,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고사포진지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군사시설 구축을 위해 수많은 한국인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아버지와 자식들이 함께 동원되거나, 농사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 대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식이 동원되기도 했다. 작업에 끌려가 다쳤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상처를 간직한 이들도 있으며, 이러한 고통의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녹색연합, 고사포 진지 모습

1945년 초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연합군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7개 지역에서 결호 작전을 준비하였다. 이 중 제주도에서 결7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미군과의 결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 병력을 배치하였다. 오키나와에서 1945년 4~6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 전투로 오키나와 주민 12만명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구자들은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더라면 제주도가 ‘제2의 오키나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조금 더 깊숙이 걸음을 옮겨 섯알오름에 도착하였다. 섯알오름은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하여 구축한 도내 최대의 탄약고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이다. 당시 경찰은 좌익세력의 후방 준동을 우려한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였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57명 중 252명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례에 걸쳐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는 끔찍한 명령 아래 총살하여 암매장하였다. 유족들은 즉시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당시 계엄군경이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고 무려 7년 동안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었다.

ⓒ녹색연합,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1956년 5월 18일 유가족의 끈질길 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 149구의 시신을 수습하였으나 이 중 단 17구만이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하였다. 나머지 132구는 서로의 시신 구별이 어려워 조각난 뼈들을 사람의 형태로만 맞추어 안장하고 ‘백 할아버지에 모두가 한 자손’ 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 칭하였다. 추모비 앞에 서 두 손을 모으고 유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잠시 생각해보지만, 억울한 죽음도 모자라 시신을 눈앞에 두고도 거두지 못하는 슬픔, 분노, 상실감이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녹색연합,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

너무나 큰 아픔을 온전히 마음에 담지 못한 채 다음 장소인 알뜨르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알뜨르는 제주어로 ‘아래 벌판’이란 뜻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항공기가 중국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다. 1938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에는 연습비행장으로 남았다. 1944~1945년 만든 38개의 엄체호(공습으로부터 비행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시설) 가운데 19개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한 때 이를 철거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워낙 단단히 지어져 철거조차 쉽지 않아 그 시절 그대로 남아있다. 한을 품고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이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녹색연합, 엄체호 전경

4.3 70주년.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우리는 이 슬픈 사건을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종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4.3에 대한 정확한 정의조차 아직 혼란스러운 채 남겨져 있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숙제로 남아있다.
현재 제주도에는 난개발과 군사기지화 되어가는 섬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저항 역시 진행형이다. 성산 신산리 마을에서 만난 성산읍 ‘제주 제2공항 건설반대 대책위원회’ 주민 분들은 어떠한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공항 사업계획을 통보한 정부에 대해, 활주로 건설로 훼손될 천혜의 자연환경에 대해, 공항이 건설될 경우 공군 기지로도 활용될 가능성에 대해 분노와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가 폭력, 국책사업, 권력, 민주적 절차를 둘러싼 갈등과 상처가 시간과 공간의 종횡을 가로질러 제주 사람들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이걸 푸는 일, 해원상생 역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녹색연합, 강정 인간띠 잇기를 마치고.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

작성: 녹색연합 임태영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