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아들 잃은 아버지, 그 침묵속의 분노

2002.05.11 | 녹색순례-2002

2002 년 05 월 11 일

아들 잃은 아버지, 그 침묵속의 분노

녹색연합 미군기지 순례기 – 다섯째 날 / 파주 답곡리에서 마주친 미군 탱크

사진 / 미군의 고압선에 팔다리를 잃은 전동록씨의 집 담에 순례단의 인사를 부치며

살아서 갚아야 할 것은 갚아야 한다.
원래 계획은 전동록 씨를 전날 밤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없었다. 지난 해 그는 7월 16일 캠프하우즈 공병여단 후문 공사현장에서 미군 고압선에 감전돼 팔과 다리가 잘려졌다. 위험하니 고압선을 치워달라는 몇 차례 요구를 묵살하던 미군은 사고 이후에도 무성의, 무대책 그 자체였다.

전동록 씨는 다리를 잘라낸 자리가 감전으로 인해 뭉쳐서 피가 돌지 않으면서 점점 곪아 이제 인조혈관을 심기로 했다. 팔다리가 잘려 처음에는 병원에서 주는 약을 한번에 먹고 죽으려고 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들 전민석 군이 “살아서 갚아야 할 것은 갚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말했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나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 애를 쓰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그는 원래 천성이 밝은 사람이라 몸을 움직이며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모금운동으로 7천만원이 모아졌고 미군은 보상금이라고 60만원을 제시했다. 그를 만나는 대신 그의 집 담벼락에 우리의 인사를 붙이던 순례단의 마음음 속에는 불덩이 같은 것이 자꾸 솟아 올랐다.

사진 / 파주지역 순례 내내 순례단의 길을 가로막은 미군탱크

미군 탱크와 대치 2시간
도대체 몇 번째인가. 미군 탱크가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이. 대한민국 군인이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는 다그마 사격장 먼발치에서 돌아나올 때가 한낮의 해가 기울어가던 3시 30분이었다. 두 시간 남짓 동안 우리는 미군 탱크와 기갑차와 트럭 12대를 비껴 걸어왔다. 우리는 지금 답곡리 좁은 농로에서 다시 10대의 탱크 부대를 만났다.

우리가 미군기지 녹색순례의 길에 오른 것은 미군들에게 싸움을 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아야만 했다. 그들이 차지한 우리들의 땅, 그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이 오염시킨 자연의 신음소리를 보고, 들어야 했다. 고통스러운 현실이 눈 감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하여 미군과 얽힌 뿌리깊은 실타래를 푸는 생명과 평화의 씨앗이 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례단은 분노를 넘어선 슬픔을 안고 답곡리 농로 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 / 마을 주민들은 탱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파주시 적성면 장파리의 다그마 사격장 앞에서 훈련을 위해 들어서는 여섯 대의 기갑차 굉음과 순례단은 처음 교차하고 산길로 접어들어 답곡리 농로 위에 섰다. 좁은 그 길로 탱크가 얼마나 다녔는지 가장자리는 부서져 가루가 되었고 탱크 바퀴 자국이 무늬를 이룬 아스팔트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농민들의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탱크는 시간당 10킬로미터 속도 이상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는 미군 스스로 세워놓은 경고문을 읽고 있을 때였다. 두 대의 미군 대형 트럭이 달려와 우리를 스쳐가는가 싶더니 멈춰서서 경적을 울려댔다.

그렇게 위압적인 미군의 대형 트럭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뜻밖에 1톤 짜리 작은 트럭이었다. 트럭 운전자는 13년 전에 미군 트럭에 치여 일곱 살 먹은 아들을 잃은 정완수(45) 씨였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5백 원을 받아 쥐고 집을 나간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정씨에게 미군들은 도로 위의 흰 천을 가리켰다. 천을 들춰본 정완수 씨는 경악했다. 아들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어린 아이를 치어놓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죽은 사람에게 하듯 흰 천을 덮어씌워 놓은 것이다. 집집마다 차가 있는 것도 버스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 그때 정씨의 아들은 병원에 닿기 전에 끝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정완수 씨는 광복절에도 대문밖에 태극기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물었다. “태극기를 왜 답니까? 우리가 해방된 나랍니까?”

사진 / 미군의 대형트럭이 비켜갈 때까지 먼산을 바라보며 꼼짝을 않던 정완수 씨. 그는 이 트럭에 아이를 잃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미군들은 경적울리기를 포기하고 그 좁은 길에서 전진과 후진을 수없이 되풀이해 정완수 씨의 트럭을 피해 갔다.

정완수 씨의 트럭이 갈 길을 가고 난 뒤, 순례단도 남은 길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려고 할 때 또다른 진동과 굉음이 다가왔다. 네 대의 탱크가 길을 비키란다. 우리는 다시 길가 숲으로 물러섰다. 위압적인 굉음과 진동을 몰고 탱크가 우리 옆을 지나자 엔진에서 뜨거운 먼지바람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이런 거였구나. 농민들이 당하는 고통이 이런 거였구나. 탱크 몇 대의 위력이 이러한데 날마다 수 차례의 탱크 부대의 소음과 진동에 시달리는 이곳 주민들과 수시로 헬리곱터가 집 위에 낮게 떠 일으키는 굉음과 후폭풍을 고스란히 겪어온 광탄면 주민들의 괴로움은 어떤 것이겠는가. 글로 읽고 말로 들은 고통이 몸으로 스며들자, 어린 아들이 죽어도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의가 고작 그들의 트럭을 막아서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스며들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참담함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탱크로 인한 피해가 사람에게 뿐 아니라 가축들의 유산, 젖소들의 유방암, 심지어 집단 폐사로까지 이어진다는 사례를 듣고 다시 길을 나서려는 순례단 앞에 또다시 탱크가 나타났다. 이제 더 이상 그냥 길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우리가 길을 막고 앉았다.

“탱크가 우리 농민 다 죽인다. 미군기지 반환하라!”

당황한 미군측에서 면담을 요구해왔다.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모든 탱크와 트럭의 엔진을 끄라는 우리의 요구를 그들은 대치 30분만에 받아들였다. 한적한 시골길, 잠시 고요를 되찾은 숲속으로 순례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미.군.기.지.반.환.하.라.”

미군은 부동산업자인가?
오늘 만난 탱크부대는 모두 캠프 게리오웬에서 다그마 사격장으로 가는 병력이었다. 캠프 게리오웬은 문산천에 접해있는 8천6백여 평의 미군기지다. 문산천 하류로 걸어서 20분 거리에는 캠프 자이안트가 주둔해 있다.

사진 / 두번의 끔찍한 홍수를 겪게 하고나서야 미군의 허락(?)을 얻어 건설된 문산천 제방

96년과 98년에 문산에는 대규모 홍수 피해가 있었다. 폭우로 역류한 임진강물이 문산천에서 범람해 문산읍 전체가 물바다가 된 끔찍한 재해였다. 이 홍수 피해는 문산천 제방만 쌓았다면 막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캠프 자이안트가 제방 쌓을 땅을 내놓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똑같은 재난을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캠프 자이안트가 주둔한 이 땅이 어떤 땅인가. 원래 이곳은 문산고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때 학교를 남쪽으로 잠시 옮긴 사이 미군들이 이 땅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문산고등학교가 문산이 아닌 금촌에 있게 된 까닭이다.

지난해에야 캠프 자이안트와 합의가 이루어져 문산천에 제방을 쌓았다. 더불어 강폭을 넓히고 정비하는 공사를 하면서 이번엔 캠프 게리오웬이 문제가 되었다. 강폭을 넓히려면 캠프 게리오웬의 집입로인 다리를 다시 놓아야 했는데 미군측은 그들이 직접 다리를 놓겠다며 그 건설비용으로 60억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가 새로 놓은 다리 세 개의 건설비용을 모두 합해도 10억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웬 60억?

사진 / 게리오웬의 ’60억’ 다리

최근에 캠프 게리오웬이 반환예정지로 올랐다. 그러자 이번엔 기지는 반환하더라도 다리는 놓아주고 가겠단다. 한 평에 50원, 60원, 또는 아예 강제 수용한 땅을 반환하면서 평당 50만 원을 내놓으라는 그들은 친절하게도 60억 짜리 다리를 기어기 놓아주겠단다. 미군은 땅장사 하러 한국에 왔는가?

캠프 자이안트 철책에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노란 띠를 묶으며, 캠프 게리오웬 정문 앞에 돌탑을 쌓으면서 우리의 이 작은 몸짓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다.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되는가?

상수원보호구역은 미군보호구역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북에서 온 화천강, 예성강이 만나 서해로 들어간다. 한국군의 저지로 스토리 사격장에서도, 다그마 사격장에서도 돌아서야 했던 순례단은 새로 지은 취수장에서 임진강을 바라보았다. 파주시 이십만 시민이 이 임진강물을 먹는다. 그러니 이 취수장 상류가 상수원보호구역인 것은 당연하다. 아는 것처럼 상수원보호구역 안에는 축사를 비롯한 어떤 오염시설도 들어설 수 없다. 심각한 문제는 스토리 사격장과 다그마 사격장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사격 연습에 쓰인 트럭에서는 흘러나온 기름과 포탄에서 나온 중금속이 날마다 임진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얼마만한 기름이 흘러들어오는지, 어떤 포탄이 얼만큼 쓰여 어떤 중금속이 물에 녹아들고 있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스토리 사격장과 다그마 사격장으로 인한 상수원 오염과 토양오염, 생태계 파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미군에게 어떤 항의도, 어떤 요구도 한 적이 없다.

미군에 의한 파주의 흥망성쇠
파주는 전기, 도로, 극장 같은 것이 경기도에서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이다. 그래서 일찍이 파주는 대도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나아졌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풍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군 병력이 분산되면서 미군들이 떠나자 이들은 장사 상대를 잃어버렸다. 다시 농사꾼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제는 땅이 없다. 이미 미군에게 다 빼앗긴 뒤였다.

사진 / 여자가 이집에 살고 있다는 미군들의 표식.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파주 기지촌 주변에서는 아직도 ‘SEX’라고 써진 담벼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치기어린 낙서가 아니다. 이 집에 젊은 여성이 살고 있다는 미군들의 ‘표식’이었다. 한때는 미군 신병이 들어오면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이런 ‘표식’이 불러온 민간인 여성에 대한 강간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자동차가 많지 않았던 60, 70년대에 가는 곳까지 태워주겠다는 미군 차량을 호의로 생각하고 탔다가 일어난 강간 사건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게 태어난 혼열아가 지금 현재 파주에 120여 명이 살고 있다. 학교에서 받는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외지로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이런 현실을 어찌하면 좋은가. 미군이 남긴 상처, 그 흔적은 이렇게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정부가 기치촌특별조치법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는 한 주민들 스스로는 복구할 수 없는 일이다.

파주에서 또 하루가 저물었다. 상처와 아픔을 똑똑히 들여다보는 일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발바닥의 물집이 터져 양말이 축축하다.【녹색순례 특별취재팀 – 사이버 녹색연합】

그 너른 미국 땅 두고 왜 장파리 와서 지X들이야
– 스토리 사격장 토지반환대책위원회 분들의 이야기

사진 / 스토리사격장 토지반환 대책위원회 – 왼쪽부터 서상봉, 우경복, 김남근(대책위원장)

우리 파주시 장파리에 스토리 사격장이 생긴 지는 사십 년이 넘었어. 미군들이 훈련하는 곳이라고 민간인을 못 들어가게 하고 농사지으러 들어갈 때는 출입증을 주고는 출입영농을 하게 했지. 우리 땅인데도 말야. 그런데 그 놈들이 낮이고 밤이고 탱크를 타고 지나가는데 한번 지나갈 때마다 집이 ‘우두우두’ 흔들려. 집집마다 벽에 금이 안 간 집이 없고 260데시빌 정도의 소음이 들리는데, 나는 데시빌이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소리 때문에 사람들 피해가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가을에 나락을 길가에 널어놓으면 피해가도 될 것을 꼭 일부러 탱크로 밟고 지나가니 사람 환장하지. 그래서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우리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갈 때 내가 뛰어 나가 막았어. 몸으로 무조건 막았어.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코란도 차를 몰고와서 탱크를 막았더니만 우리 동네 한가운데로는 이제 안 다녀. 동네 밖으로 돌아 가지. 자꾸 항의를 하고 그러니 낮엔 안 다니고 새벽에 동네 밖을 돌아가는데, 이젠 새벽을 젖을 짜야 하는 집들이 문제야. 새벽에 탱크가 지나가니 젖을 짜던 소가 놀라 펄쩍 뛰어서 그 집 어른이 젖소 뒷발길질에 얼굴을 맞아서 얼굴이 기형처럼 일그러졌어. 어떤 사람은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도 있고, 송아지는 자꾸 유산되고 젖도 이전의 반밖에 안 나오고 미군놈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또 그놈들 하는 짓이 말야. 탱크하고 장갑차 아직 쓸만한 것들을 들에 드문드문 세워놓고 사격하는데 표적으로 써. 기름이 잔뜩 들어있고, 납도 들어있는데, 거기다가 포를 쏘니 그것이 다 땅으로 흘러 들어가지. 그리고 그 놈들이 쏘는 탄이 무슨 종류인지, 열화탄인지 뭔지 얼마나 나쁜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고 말이야. 한 두서너 발을 탱크에다 쏘고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와서는 하루종일 연구해. 국민들이 못 보는 최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 놈들이 뭘 하는 거겠어? 왜 그 너른 미국 땅 두고 이 작은 장파리에 와서 그런 연구를 하느냔 말야. 좋은 거면 여기서 하겠어?

우리 마을은 최전방 마을이라 경찰이나 군부대나 다 예민한 곳이라서 우리가 미군들한테 항의하면 우리 경찰이나 군인들이 와서 막아. 사람으로 서로 못할 짓이야. 마을 사람들도 옛날부터 길이 잘 들어 있어서 웬만한 피해는 참고 말야. 우리가 항의하거나 민원을 넣으면 우리한테 직접 대답해 주지 않고 근처 군부대에다 답을 해 줘. 뭐 대부분은 군사작전이라 말 할 수 없다고 하지. 임진강에 들어가 수영을 못 한 지도 삼십 년이 넘었고 우리 논에 철조망을 쳐놓고는 못 들어가게 해서 농사 못 지은 지도 꽤 되었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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