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3일차] 생명이 움트는 공간에서 아픔을 느끼다

2014.04.23 | 녹색순례-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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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깊게 찾아온 산사의 밤이지만, 아침이 오니 서슴없이 자리를 물러납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침공양을 올립니다.
“이 음식에 깃든 수고로움과 그 유래를 생각하노니 부족한 내 덕행으로는 공양 받기가 송구스럽네. 마음 속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다만 야윈 육신을 지탱하는 양약으로 삼아 깨침의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오관게]의 구절을 마음에 담습니다. 음식 먹기조차 부끄러운 참으로 얄팍한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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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입니다. 올챙이도 제자리 찾기에 분주합니다. 녹색순례의 첫 순서는 늘 몸풀기입니다. 순례 3일째, 쌍계사에서 출발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잇는 구간입니다. 바다를 향하는 섬진강의 오른편은 전남 광양이고, 왼편은 경남 하동입니다. 남도대교를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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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장터부터 악양면 평사리까지 조성된 섬진강 걷는 길로 접어듭니다. 아직 공사 중입니다. 국토해양부가 책임지고 ‘생태’ 걷는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투박합니다. 생명에 대한 배려는 없고 전적으로 ‘인간’, 그것조차도 아주 이기적인 인간을 위한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걸었던 흔적을 없애고, 대나무숲도 마구잡이로 파헤쳤습니다. 베어 버린 그 길에 대나무 새순이 또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럴 바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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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녹색연합 활동가와 회원들이 오고 갑니다. 걷다가 신발끈 풀고 한 귀퉁이에 몸을 맡겨봅니다. 그리고 환하게 웃습니다. 그리 분주한 말들이 오가지는 않지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듯 합니다. 물, 바람, 산, 하늘이 어울립니다. 섬진강은 남해바다의 바람, 모래톱에 기댄 삶, 지리산이 품은 평사리 들판이 있어 온전한 ‘섬진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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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봄은 벚꽃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 시기에 섬진강에는 꽃비가 내립니다. 혼인색을 띈 황금색 황어떼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새끼 내기 좋은 곳에 산란합니다. 황어떼가 생을 마감하자 이번에는 은어 무리가 섬진강에 가득합니다. 꽃비가 지나면 찻잎이 세상 처음으로 선보이며 지리산은 녹차 덖는 향으로 자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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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들판은 섬진강 오백 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합니다. 이곳에 생명이 가득 흐릅니다. “이 넉넉한 들판은 모든 생명을 거두고 자신이 키워낸 쌀과 보리로 뭇 생명의 끈을 이어줍니다.” 청보리밭 위로 바람소리가 흐릅니다. 동정호수에는 산란기 맹꽁이 소리로 요란합니다. 곧 이어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겁니다. 이렇듯 생명을 만끽해도 한평생이 모자랄 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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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살아야 할 생명이 숨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시절, 아쉽고 슬프고 아픕니다. 당연히 웃어야 할 이들의 얼굴이 너무도 차갑습니다. 속이 울컥울컥 걷잡을 수 없습니다. 녹색연합의 오래된 스승인 박영신 선생님께서 일갈하십니다. “우리는 한 생애 소풍 나온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사였다고.” 그렇게 말해야 되지 않냐고 하십니다. “전사가 되라”고 하십니다.


-녹색순례 물 모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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