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 즈음 그날 밥을 맡은 모둠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합니다.
어젯밤 마을회관의 시멘트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한뎃잠을 잔 순례대원들을 위해 뜨끈한 계란 국을 끓이고 아침밥과 도시락을 쌀 점심밥을 두 솥 짓습니다. 순례에 와서 처음 파를 다듬어 본 이도 있고 반대로 아무도 몰랐던 요리 실력으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나 둘 일어나 빠르게 배낭을 쌉니다. 배낭을 싸는 모습만 봐도 누가 순례경험이 많은 지 아닌지 보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녹색순례의, 아니 녹색연합의 공식 밥가를 부르고 아침밥을 먹습니다. 오늘 하루 걸을 길과 날씨와 서로의 몸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받아놓은 쌀뜨물로 설거지를 합니다. 순례 땐 설거지도 좀 다릅니다. 커다란 설거지통 3개에 쌀뜨물, 1차 헹굼물, 2차 헹굼물을 받아 가능한 물을 적게 쓰는 법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모둠마다 배정받은 곳을 구석구석 청소합니다. 주로 마을회관, 복지관 같은 곳을 얻어 쓰니까 사용한 뒤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옵니다. 큰 배낭은 트럭에 싣고 작은 배낭을 메고 다시 오늘의 순례길에 나섭니다.
오늘 우리는 이번 순례의 첫 번째 목적지인 설악산으로 들어갑니다. 어제 한계령을 바라보며 양양 서면까지 왔고 오늘은 서면에서 오색약수로 유명한 오색리까지 걸어갑니다.
44번 국도를 따라 조금씩 오르막을 타고 걷다보니 우리가 걷는 길옆으로 나란히 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기존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대신해 터널(남설악터널)을 뚫어 만든 직선의 새 도로가 같은 이름 44번 국도로 나 있는, 이른바 중복도로입니다. 평일엔 하루에 차가 몇 대 지나가지도 않는데, 굳이 이렇게 도로를 낼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구불구불한 도로가 강원도의 길을 제대로 느끼게 해 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낭비되는 돈을 대체 얼마일까? 이왕 새 도로를 만들었다면, 옛 도로는 자연에 되돌려 주는 ‘복원’을 추진해 보는 건 어떨까?
한 시간 가량을 걷고 잠시 쉬고 다시 걷고 그러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다시 걷고, 걷다 마주하는 여러 순간순간을 같이 느끼고 이야기하며 하루하루의 길을 걷습니다. 처음엔 멀게만 느껴지던 그 길이 걷다보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 빨리 가는 법은 없습니다. 차근차근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걸어가야만 목적지에 이른다는 걸 우리는 걸으면서 배웁니다. 오늘은 설악산 밑 오색리에서 하루 순례를 마무리했습니다.
오색약수 한 주전자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밥을 지으면 철분 때문에 푸르스름한 색의 밥이 되던 오색약수는 온갖 병에 효능이 있다고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예전만큼 오색약수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양양군은 오색부터 설악산 끝청까지 연결하는 케이블카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케이블카가 오색약수의 옛 명성을 되찾아 주리라는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설악산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을 택한, 케이블카를 타러 온 이들이 과연 이곳 오색약수 마을에 머물며 먹고 잘까요? 이 곳은 그저 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케이블카를 둘러싼 여러 환경문제를 뒤로 하고, 정말 케이블카가 이 마을에 이득이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어집니다.
저녁밥을 준비하는 모둠이 서둘러 밥을 짓고 다른 이들은 짐을 풀고 다시 모여 노래 부르고 밥먹고 설거지하고 저녁모임을 하고 그렇게 순례 하루가 마무리됩니다. 각자의 침낭 속에 애벌레처럼 들어가 내일 길을 생각하며 잠이 듭니다. 내일은 대청봉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힘든 산행이라고 합니다. 푹 자야겠지요.
글: 정명희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