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5] 빈민층에게 먹을거리 제공하는 푸드마켓

2004.05.19 | 미분류

봄기운이 가득한 3월26일 오후 1시30분 서울 도봉구 창동역사 아래는 어디선가 몰려든 이들로 북적댔다. 신장개업이라도 한 걸까? 이내 가게 입구에는 길게 줄이 이어졌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가게, 살림은 궁핍하지만 마음은 푸근한 이들의 단골가게인 ‘푸드마켓’(Food market)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3800명 회원들의 웃음 25평 정도 되는 매장 안. 쌀과 야채 등을 적당한 크기로 포장해 진열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진열대에는 쌀·배추·생선·과자·기저귀·사탕봉지·주스 같은 생활필수품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곳은 오전 11시~12시50분, 오후 2~5시까지 문을 연다. 양은 한정돼 있고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많아 오전에 이미 한바탕 북새통이 휩쓸고 지나갔다. 오후 개점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았는데 밖에는 벌써 스무명이 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을 서 계셨다.

푸드마켓은 먹을거리의 생산·유통·소비 과정에서 남은 것을 기증받아 필요한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는 가게다. 수요자들이 원하는 식품을 제때 제공받기 어렵고, 기탁 상품을 일일이 찾아 배달해주는 번거로움이 있던 ‘푸드뱅크’와는 다르게 ‘가게’에서 수요자들이 원하는 물품을 고를 수 있다. 먹을거리들은 모두 무료다. 푸드뱅크의 역사는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실직자나 노숙자처럼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서 시작됐다. 그 뒤 적은 양이더라도 지역주민이 먹을거리를 기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고 기탁자와 수요자가 함께 만나는 장터 형태의 음식나눔 중개공간인 푸드마켓이 생겼다.

처음 200명 정도였던 회원은 1년이 채 안 돼 38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용 고객들은 영세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80대 노인과 10대 아이들, 장애인, 소년소녀 가장 등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들이다. 이들에게 이제 ‘푸드마켓’은 생명줄 같은 존재가 됐다. 하루 평균 이용객은 90~120명 정도다.

쌀과 생선, 양배추를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은 뒤 마지막으로 사탕 두 봉지까지 집어든 이계순(82) 할머니에게 사탕을 가져가는 까닭을 여쭈었다. 지난주 복지관에서 사진도 찍고 노래도 배우며 즐겁게 논 동무들이랑 나눠먹을 거란다. “시대가 어렵고 힘들잖아. 어려운 사람들도 너무 많아.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주는 게 고맙잖아”라며 활짝 웃으셨다. 푸드마켓은 가난한 이웃의 단골가게이자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방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골손님의 절반 이상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지만 먹는 데 드는 돈을 줄일 수 있어 번동에서 이웃들이랑 왔다는 김종순(84) 할머니. 미아동에서 오늘 처음 오신 김옥두(73) 할머니는 푸드마켓의 회원카드를 만드는 중이다. 경제사정이나 거주형태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 답을 하고 의료급여증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원등록이 끝났다.

가난한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는 가정도우미들도 눈에 띄었다. 97년부터 가정도우미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윤유심(54)씨. 중계동에 살고 있는 장애우의 밑반찬을 해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윤씨는 늦게 온 탓에 생선 두 손과 주스, 쌀, 배추들을 장바구니에 넣으며 이 정도로 밑반찬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마른반찬과 생선같이 밑반찬을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골고루 많았으면 좋겠어요.” 가게 한쪽에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야채와 과일을 후원하는 농협하나로마트 창동점, 빵을 후원하는 던킨도너츠 창동점, 쌀을 지원하는 조계사, 밀가루와 배추를 지원하는 한강시민공원 환경녹지과, 양념을 지원하는 제일제당과 해찬들, 부식을 지원하는 삼양사 같은 기업 15곳과 여러 단체들이 꾸준한 후원자라고 한다. 개인 후원자들도 많다. 필자가 찾은 날에는 부산의 대명상회에서 돔과 참조기 같은 생선을 한 아름 보내왔다. 푸드마켓에서 가장 바쁜 최장원(30) 과장. 기탁물품을 가져오는 일이며 기탁자를 발굴하는 일, 가게 운영까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일 틈도 없다.

드디어 가게문이 열렸다.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강화도에서 온 쌀과 야채류가 먼저 동이 났다. 오후의 최고 인기 품목은 부산에서 방금 올라온 생선이었다. 호떡집에 불난 듯 30분 만에 동이 나버렸다. 자원봉사자들이 없다면 가게를 꾸려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태양회 회원 30명이 푸드마켓을 돕는 일을 해주고 있다.

식품에 문제 생겨도 기탁자 보호해야 푸드마켓은 서울시에서 예산과 행정 지원을 하고,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가 위탁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복지정책팀장 김정기(52)씨는 “앞으로 저소득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4개 권역별로 나눠서 가게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악구·동작구·강동구 같은 곳에서 이곳까지 오는 이들도 많아 권역별 확대 운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푸드마켓의 가장 큰 고민은 주식(쌀·밀가루·양념)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식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기탁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없는 것도 기탁자를 확대하는 데 걸림돌이다. 보건복지부는 기탁 식품으로 생긴 문제의 책임을 기탁자에게 묻지 않는 내용의 ‘식품기탁촉진법’을 지난해 국회에 냈지만 법안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푸드마켓에서는 남은 물품 중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지역 푸드뱅크를 통해 필요한 사람에게 곧바로 전달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길거리에 음식물 쓰레기가 늘어날수록 배고픈 이웃들도 늘어만 간다. 비울수록 더 그득해지는 우물의 지혜처럼 많이 나누고 다시 그득 채우는, 여유로운 지구별을 함께 가꾸어보는 건 어떨까?(문의전화: 푸드마켓 02-907-1377) <끝>

이글은 한겨레21의 <김타균의 풀뿌리대안운동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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