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마루금 조령에서 은티재를 걷으며….

2004.07.13 | 백두대간

7월 8일부터 11일까지 3박 4일간, 백두대간 조령에서 은티재 사이 마루금 훼손 실태 2차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1차 때도 참여하였으며 이 번이 나에게는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첫 째날 우리 일행은 1차 조사 때 마지막 도착지였던 조령 제3관문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고사리’마을로 ‘수안보’를 경유하여 찾아갔다. 이곳에서부터 계속 조사를 이어나갈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넉넉한 모습의 민박집 할머니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곳에서 숙박한 일은 없었지만 1차 조사를 끝내고 내려오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와 얘기할 기회를 가졌었기 때문에 우리와는 구면인 셈이었다.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경계에 끼어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고사이’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부르기 쉽게 ‘고사리’마을이 되었다고 하는 말도 그때 들은 내용이었다.

우리의 조사는 다시 ‘조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 영남에 살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개였다고 한다. ‘영남’이라고 하는 말도 ‘조령’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유서 깊은 곳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호남’이라고 하는 말은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 ‘호수’는 김제의 ‘벽골제’라고도 하고 ‘금강’을 일컫는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마르지 않는다는 조령약수에서 시원한 물을 한 잔씩 마시고 물병을 채운 다음 남쪽 방향으로 마루금을 조사하며 첫 번째 봉우리인 ‘치마바위봉’을 향하여 올라갔다.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가 봉우리 근처에서 우리는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튼튼하게 보이는 50대 남자인 박씨 아저씨를 만났다. 구간별로 끊어서 며칠 단위로 종주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오늘도 새벽 4시에 출발했다는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점심도 특별히 준비하지 않고 간간이 빵으로 때운다며 그 때에도 서서 빵을 먹고 계셨다. 아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그에게서 그가 걸어온 마루금에 관해 여러 가지 좋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길을 잃고 2시간 정도 고생하다가 만난 ‘백두대간’ 표지기를 보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는 얘기와 ‘백화산’근처 마루금의 희한한 모습에 대한 얘기 등등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조령산을 향하여 마루금의 상태를 조사하며 길을 재촉했다. 산을 좋아해서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 등 많은 산을 다녔지마는 이렇게 내가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 전에는 ‘백두대간’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때여서 산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는 의식은 없었고 단지 우리나라에는 정말 좋은 산이 많구나 하는 감탄은 수없이 하며 다녔었다. 그런데 하늘과 맞닿은 백두대간에서 이렇게 의미있는 일을 하며 걷고 있으니 그 또한 보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마루금을 걷다보니 ‘까치수영’꽃은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중나리, 기린초, 큰원추리, 노루오줌, 은꿩의다리, 철 지난 ‘꼬리진달래’꽃 등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미 많은 물을 소비해버린 우리는 한 동안 갈증을 참아야만 했고 조령산을 넘어 조령샘에 도착해서야 시원한 물을 실컷 마실 수가 있었다.

오후 6시쯤 도착한 이화령에서는 아래 마을 ‘각서리’ 이장님의 도움으로 이장님 승용차를 타고 ‘각서리’ 마을회관까지 갈 수 있었다. 차 안에서 이장님에게 들은 ‘각서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집성촌이 많았던 옛날에 이곳에서는 각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라 ‘각성리’라고 불리우다가 ‘각서리’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들의 유래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노인회관을 겸하고 있는 마을회관에서는 여러 마을주민들이 모여서 감자를 삶아 먹으며 담소를 즐기고 있었으며 막 도착한 우리에게도 한 바구니 건네주어서 시장한 참에 잘 얻어먹었다.



둘째날, 우리는 모레에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에 일정을 바꾸어서 은치재에서 희양산을 포함한 구간을 먼저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곳은 봉암사 스님들이 백두대간에 일반인들이 못 들어가게 지키고 있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이미 허가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모레에 비 때문에 그곳을 조사하지 못하게 되면 또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그곳을 먼저 조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은치재로 올라가는 초입 마을 ‘은티’에서는 주민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등산객들이나 행락객들이 버스로 대절해 놀러와서 여러 가지 추태를 보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행락을 즐기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은티’에서 ‘은치재’로 올라가는 길을 아주머니에게 물어보고 올라갔지만 마을 끝에 있는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자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흔적이 난 길을 따라 올라갔지만 방향이 점점 수상해졌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독도를 해가며 산속을 헤매다가 출발한 지 1시간 30분정도 지난 9시 40분쯤에야 간신히 은치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치재부터 마루금의 상태를 기록하며 구왕봉을 넘어 지름티재에 도착하자 아닌게아니라 울타리를 쳐놓고 봉암사 스님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여서 통과시켜 주었고 봉우리로 올라가는 스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스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스님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지만 경사가 가팔라서 그런지 희양산으로 올라가는 일부 구간은 마루금이 훼손되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올라가면서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스님에게 절에 관한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봉우리에 올라서자 스님은 다른 곳에서 봤다는 주먹만한 동물 발자국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스님은 그 동물 발자국이 호랑이 발자국은 아닌지 상당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개 발자국이 그렇게 크게 찍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희양산을 넘어가는 길은 좌우 양쪽이 급경사를 이루어서 우뚝 솟은 좁은 마루금에서 조사 틈틈이 멋진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으며, 하늘말나리, 여로, 솔나리, 노루오줌, 짚신나물, 꿩의다리, 동자꽃 등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녹색의 바다에서 살점이 허옇게 드러나 보이는 맞은 편 한 광산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마루금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게 보였으며 더 이상 훼손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루금을 가는 도중 만난 시원한 물이 흐르는 한 계곡에서 우리는 심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으며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 구간에서 직선으로 길이 나있는 계곡을 건너면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가는 길이 아닌 시루봉 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서 주의를 요하는 길이다. 이만봉과 곰틀봉을 넘어가며 조사를 계속한 우리는 무사히 사다리재에서 하산할 수 있었으며 하산길에서 본 많은 산수국의 아름다운 꽃은 우리일행을 기쁘게 하였다.

* 우리 일행의 이동에 많은 도움을 주시고 음식까지 대접해 주신 문경에서 선생님으로 재직하시고 계시는 권대성 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글 : 자원활동가 이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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