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이 강원도고 강원도가 화천이다.

2013.06.04 |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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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에서 바라본 전경_녹색연합>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일이다.

화천 백암산. 높은 산과 깊은 골이 강원도의 상징이라면 바로 화천이 강원도고 강원도가 화천이다.

오늘 목표는 사향노루. 아침 8시 7사단 초소를 통과한 일행은 백암산 주봉이 일직선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30분이나 늦었다. 초소에서의 출입절차가 발목을 잡았다.

미리 준비한 무인센서카메라 25대가 10개의 배낭에 차례로 나뉘어 담겼다. 각각의 배낭 주인들은 피곤한 듯 한 퀭함을 비로써 떨쳤다. 일행은 진작에 오늘을 위한 우정 어린 타협을 끝냈지만, 어쩐지 사뭇 서로에 대한 경계와 결연함까지 엿보인다. 사실 타협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4인은 백암산 주봉(1100m)까지 2.2km의 직선코스 전구간에 카메라 설치를 주장했고, 나머지는 중간부 설치에 부정적이었다. 아니 부정적인 의견을 넘어 무조건 불가하다는 입장에 가까웠다. 회의 자리는 윽박지르는 고성을 넘어 급기야 서로 노려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고, 중재자의 목소리는 힘없는 볼멘소리였다. 결국 전구간 설치로 합의되긴 했지만, 단서조항이 붙었다. 당일 지형조건 등을 고려해 현장에서 판단하자는 내용. 전구간 설치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연신 드러냈다. 일반적인 등산으로는 어려운 코스라고 거듭 강조했으며 혹 무리한 강행을 주장한다면 자기들은 뒤돌아 내려오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그럼에도 ‘우정 어린 타협’이라 칭한 것은 적어도 책상을 뒤엎은 사람은 없었고, 그칠 줄 몰랐던 공방은 결국 끝났으며, 마지막엔 모두가 달가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서로 간 악수를 나눴다.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정도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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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센서카메라 설치를 위해 백암산에 오르는 모습_녹색연합>

 

흐린 날씨는 기어이 비를 뿌렸다. 일기예보에 비소식은 없었지만 언제고 일기예보가 믿음직했던 적이 있었던가. 역시나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전구간 설치파 4인은 철수를 요구했고, 나머지 부분 설치파 6인은 우선 진행을 이야기했다.

오락가락 하는 빗방울을 미심쩍어하며 결국 진행하기로 결정했지만, 걱정과 우려는 산에 들면 들수록 뚜렷하게 늘어갔다. 저들의 말처럼 주봉까지 2.2km 일직선 구간엔 3개의 커다란 바위벽이 버티고 있다. 주봉까지 폭 40m 직선구간을 제외하면 발 놓을 공간은 없다. 나머지는 미확인지뢰지대다. 따라서 바위벽을 만나면 등반 가능한 루트를 찾아 우회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젠 거기에 더해 기상상태까지 불안하다. 이대로라면 정상까지 2.2km 전구간 등반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당연히 전구간 카메라 설치는 물 건너가고, 설치한 카메라로 사향노루를 촬영할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애초 설치 불가구간으로 얘기됐던 곳이 사실은 사향노루가 다닐 길목으로는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향노루가 지날만한 길목에 카메라를 하나씩 설치해가며 전진한다. 오르는 동안 산양 똥은 지천이다. 혹 사향노루 똥이나 털 같은 흔적이 없나하고, 한 치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하긴 이리 쉽게 발견된다면 그게 어찌 사향노루겠는가. DMZ 일원을 제외하면 남한에선 씨가 마른지 오래다. DMZ일원에서도 몇 마리가 사는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많아서가 아니라 워낙 희귀해서 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의미가 없어서다.

오후4시30분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은 이젠 빗줄기가 되었다. 정상까지 가면 GOP 군인들이 사용하는 교통호가 있고, 산을 내려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 만약 뒤돌아서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의 어둠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한 일이다. 부분 설치파 중 일부는 오후 3시가 되기 전 발길을 돌려 내려갔다. 이제 남은 건 무조건 정상으로 향하는 것뿐이다.

오후5시30분 정상까지 이제 50m. 하지만 우리 눈앞엔 마지막 바위벽이 버티고 서있다. 지나쳐온 것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얼굴을 때렸던 빗줄기는 눈송이로 바뀌어 있다.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는 증거다. 어서 빨리 정상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난 일행을 벗어나 바위벽 왼쪽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미확인지뢰지대라 멀리까지 우회할 수도 없다.

성긴 구름은 빼곡히 짙은 먹구름으로 변해있고, 눈송이는 눈에 뛰게 굵어져 있었다. 머리위 구름이 눈앞까지 내려와 시계는 3m가 채 되지 않는다. 이젠 여기가 미확인지뢰지대인지 저기가 미확인지뢰지대인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지난 4월25일 화천출장 때 이야기다. 녹색연합은 이곳 백암산에 케이블카설치를 목적으로 한 개발 사업을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그러다 2011년 5월 국립환경과학원이 백암산에서 사향노루를 촬영했고, 그에 따라 강원도 화천 백암산은 남방한계선 이남에선 유일한 사향노루 서식지로 확인됐다. 하지만 케이블카 건설 계획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 출장은 2.2km에 이르는 백암산 케이블카 설치 전구간에 걸친 무인센서카메라 설치가 목적이었다. 지난한 공방을 거듭하며 사업자인 화천군과 타협을 이뤄낸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이날 21대의 카메라를 2.2km 전구간에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60일 후 이 곳에서 사향노루 서식이 확인된다 해도 케이블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밀렵으로 거래되는 사향노루는 적게는 3천에서 많게는 3억에 거래되는 절대보호종이다. 카메라 설치한지 이제 60일이 다가온다.

248km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각각 2km 씩 한계선을 설정한 중간 지역이 DMZ다. 그리고 DMZ 외곽의 민간인통제구역을 포함해 DMZ일원이라 칭한다. DMZ일원에는 67종의 멸종위기종을 포함 2700여 종의 야생동식물이 살고 있다. 그야말로 한반도에서 생태계 보전으로는 1등인 곳이다. 분단 60년이 가져온 방치가 역설적이게도 천혜의 자연을 만들어 놨다. 하지만 DMZ는 백암산 케이블카처럼 여기저기 다양한 개발 사업들이 관광개발 한답시고 예정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생태계의 보고’는 말뿐인 수사로만 그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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