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원으로 바뀌는 용산기지, 사라진 마을 이야기

2020.09.05 | 군기지

[용산공원을 상상하다①]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인터뷰

용산은 오랫동안 군사기지였던 탓에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2019년 12월, 용산기지 반환 협상이 시작되면서 오래도록 미뤄졌던 용산기지 공원화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한 세기 넘게 군사기지였던 땅이 생태역사공원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새롭게 들어서는 공원에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깨진 유리 조각 맞추듯 오랫동안 용산이라는 공간에 천착한 사람들을 만나 담장 너머 펼쳐질 공간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역사, 생태, 예술, 환경 분야의 전문가와 활동가를 만나 용산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기자말]

“용산기지에 축구장이 몇 개나 들어갈 것 같습니까?”

서울 한복판, 면적은 80만 평, 축구장은 340개가 들어가는 미지의 땅이 있다. 백여 년 넘게 군사기지였던 탓에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금단의 공간’이자 외국군이 주둔했던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었던 땅 용산. 하지만 용산기지도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던 때가 있었다. 

용산기지가 들어서기 전 둔지산 자락에 살고 있던 둔지미 마을 사람들. 둔지미 마을의 역사를 규명하며 용산미군기지가 외세주둔의 역사로만 점철되었다는 기존의 역사 인식을 깬 사람이 바로 용산문화원의 김천수 역사문화연구실장이다. 지난 8월 18일 수령이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보호수로 둘러싸인 용산문화원 옆 심원정 정자에서 김천수 실장을 만나 용산기지가 들어오면서 단절된 땅의 역사와 용산공원에 담아야 할 역사 복원 문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를 설명 중인 김천수 역사문화연구실장 ⓒ 녹색연합

김천수 실장은 손꼽히는 용산기지 역사 전문가이다. 용산기지 내의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한 경험으로 십수 년 넘게 용산기지의 역사를 연구해왔다. 2018년부터는 용산기지 버스 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용산기지 내부의 숨은 역사 문화적 명소들을 안내하고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용산기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정부가 오랫동안 용산기지 공원화를 설계해왔지만 일반 시민들의 체감은 낮은 편이에요. 서울의 한 중심에, 용산구 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축구장은 340개가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의 부지인데도 말이죠. 제가 용산기지의 역사연구를 한 지도 오래되었고 무엇보다 현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관심과 애착이 있어요. 연구자니까 사료를 분석하거나 책을 펴내는 일도 많이 하지만, 버스투어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곳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고 제가 연구해서 알아낸 내용을 현장의 목소리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둔지미 마을은 용산기지 역사의 뿌리

김천수 실장은 용산기지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용산기지 백여 년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1904년 8월 15일 용산 일대 300만 평을 수용합니다. 그런데 처음엔 300만 평이었던게 1907년경에는 118만 평으로 줄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일본군이 내가 사는 삶의 터전을 빼앗고 (기지로) 수용을 한다고 하니까 이 안에 살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던 거죠. 2009년 일어났던 용산참사처럼, 소위 둔지미 참사라고 말할 만큼 그 일대에 있던 마을들이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 용산기지 조성 후 사라진 마을이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김천수 재편집

일본은 러일 전쟁 발발 직후 한국침략의 교두보로써 용산역 일대의 철도 기지화와 함께 용산역 동쪽 둔지산 일대의 대규모 군사기지화를 진행한다. 현재 사우스포스트 북동쪽에 남아있는 구릉지인 ‘둔지산’ 자락에는 당시 둔지미 신촌, 정자동, 대촌, 단내촌 등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의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토지수용과정에서 소멸되며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다. 생계 수단인 논과 밭을 잃은 둔지미 주민들은 분노에 찬 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이렇게 강제 수용한 땅 중 일본군 기지에 포함되지 않은 토지는 일본인들에게만 헐값으로 팔았다. 김천수 실장이 펴낸 지역사 기초자료집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에는 당시 둔지미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연강 각 주민 1000여 명이 분묘와 가옥과 전답을 잃은 일을 어제 내부에 호소한 즉 내부대신이 타일러 말하되, 너희들의 가엷은 사정을 군사령부와 일본공사에게 교섭하여 조처할 터인즉 물러가 기다리라 하니 주민들이 이 일의 조치가 늦음을 혐오 원망하여 한바탕 소란한 광경이니 위험한지라, 일본 헌병이 정탐차 와서 보다가 칼을 뽑아 꾸짖어 물리치려 하니 주민들이 한층 격분하여 관청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리고 일헌병에게도 투석하니 헌병이 헌병대로 달려가 보고하여 일본군이 와서 진압하려 할 때, 주민 중 유근룡, 안명수, 신봉서는 왼쪽 귀와 왼팔에 부상을 입고 내부 주사 임학래는 군중 틈에 끼어 피신했다가 왼팔을 부상당해 방금 한성 병원에서 치료하며, 내부대신(이지용)은 후문으로 탈출하여 요행히 무사했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11일

“이런 마을들이 다 쫓겨났던 역사가 있는지조차 우리는 잘 모르잖아요. 용산은 110년 넘게 일본군, 미군, 한국군이 번갈아 차지했던 군사기지였고 지금도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지만, 군사기지로서의 역사 이전에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는 거예요. 바로 이 지점부터 용산기지의 역사복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기지 건설 이후 이어진 일제강점기엔 대한제국 병합과 중일전쟁, 만주사변,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굵직한 사건들이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일제의 조선군사령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또한 해방 직전 태평양과 만주로 강제징병 된 많은 조선 청년들이 자의 또는 타의로 끌려와 훈련을 받았던 곳도 이곳 용산기지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해방 이후 1945년 9월 미군이 용산기지를 접수하여 3년간의 미군정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용산기지의 주인이 한국군인 때도 있었다. 바로 미군이 철수한 1949년 6월 30일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1년의 기간이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이듬해인 1949년 6월 말부로 케이맥이라는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미군이 대부분 철수합니다. 118만 평의 넓은 땅이 비니까 당시 을지로에 있었던 우리나라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기지로 들어오죠. 이때가 정부 수립 이후 육해군이 창설되면서 군의 뿌리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바로 그 1년 동안 고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종필, 육군총참장이었단 채병덕, 얼마 전 타계한 백선엽 장군 등 한국현대사에 큰 궤적을 그렸던 많은 사람이 이 공간을 거쳐 갔죠. 또 6.25전쟁이 터지자마자 발생한 한국사의 비극인 한강 다리 폭파 결정도 바로 이 용산기지 육군본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용산기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연구 필요

일본군이 주둔했다, 미7사단이 주둔했다가 우리 군대, 다시 미8군 사령부가 들어서는 복잡다단한 용산기지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들은 벌써 머리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의 복잡함에 탄성을 내지르기도 하지만, 김천수 실장은 아직도 각 시기와 장소 별로 연구되지 않은 역사가 태산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한국 국방부주둔기를 지나서 6.25전쟁 때는 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북한군과 중공군이 용산기지를 사용했는데 그들이 기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연구가 되어있지 않아요. 또 6.25전쟁 때는 용산기지에 엄청난 폭격이 있고 건물 및 인근 주민들의 엄청난 피해가 있었는데 그런 역사도 아직 연구되지 않고 묻혀있지요. 미8군사령부가 1953년 용산기지에 들어오고 1970년대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그 이후로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만 그 이전인 1950~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는 아직도 역사 연구가 안되어 있습니다.”

용산기지는 단순히 군사사적 가치만 지녔을 뿐 아니라 대중문화사와 사회경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옛 둔지미 신촌마을이 있던 곳이자 현재 드래곤힐 호텔 자리에 있었던 미8군 클럽은 당대를 풍미했던 많은 한국 가수들이 거쳐 갔다. 또한 메인포스트 미8군사령부 왼쪽에 있는 OEC라는 주한미경제조정관실은 전후 재건과 원조 등 50년대 한국경제를 총괄했던 중요한 지부이다. 시기별로, 일본과 미군의 군사전략에 따라 공간과 건축물이 변해간다. 이런 건물 하나하나가 어떻게 지어졌고,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추적하다 보면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역사와 환경도 큰  틀에서 다르다고 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이 얼마나, 어떻게 오염되었는지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그 땅의 스토리를 알아야 하겠죠. 당연히 녹사평 일대에는 주유소가 있으니 많이 오염되었을 테고, 차 수송부지나 기름을 사용했던 장소는 당시 환경기준이 엄격하지 않았으니 수십 년 동안 오염이 되었을 수밖에 없어요. 시기별로 땅의 스토리와 역사와 문화, 경제사, 사회사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현재는 그런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죠. 이 공간의 역사성과 장소성,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부분까지 좀 더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고 연구 조사되어야 할 타이밍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지가 부분적으로 반환되고 있고 용산기지의 90% 이상이 평택으로 내려갔잖아요. 하나의 전환적인 시점이라 생각해요. 저도 용산구 지역의 중요한 역사문화유산이자 지역사로 조금씩 연구를 하고 있지만 중앙정부나 서울시 차원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인력과 재원을 보충해 연구를 더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산공원에 대한 논의, 현장에 기반해야

김천수 실장은 역사 연구와 투명한 정보공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공원에 대한 논의 또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7년에 용산공원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이 공간을 함부로 개발하는 게 아니라 역사성과 민족성을 갖춘 생태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냈고 그것이 바로 용산공원 기본계획의 큰 틀이지 않습니까. 이제 세부적인 것들을 논의해야 하는 첫 시작점인데, 대국민 공론화도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현장을 직접 보고 해야 한다고 봐요. 버스 투어를 통해 2천 명이 넘는 국민들이 다녀갔는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와보기 전에는 미디어에서 들은 대로 모두 오염되거나 군사 건물로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이 자체가 공원이고 그대로 보존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꽤 많았어요. 아직은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지만 많은 분이 공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정보를 많이 접하면서 용산기지의 논의를 차근차근히 해나가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지난 7월 발표된 용산공원 조성계획안에는 역사의 치유 외에도 지형과 자연의 치유 개념이 담겨있다. 용산기지 내에 남아있는 생태환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김천수 실장은 용산기지 내부를 ‘별천지’라 표현했다.

“용산기지 안에 들어가 보면 드래곤힐 호텔 언덕 자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군락지가 있어요. 한미연합사 뒤편으로는 만초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딱따구리 소리에 야생 꿩도 볼 수 있고요. 군사기지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이 삶을 영위했던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녹지도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용산기지에 용산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곳(용산문화원이 있는 청파동, 효창동, 원효로동 일대)이 옛날에는 용산이었어요. 1970년대까지 용의 모습을 한 것 같은 어마어마한 산이 있었는데 이게 다 개발되면서 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됐죠. 그런데 기지 안에는 수천 년 된 구릉지가 아직 남아 있잖아요. 그것만으로 저는 기적이라고 봐요. 지형을 완벽히 복원하는 것은 장기적인 계획이겠지만 이미 있는 것만이라도 잘 보존하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둔지산의 수백년 된 느티나무 ⓒ 김천수
복개되지 않고 흐르는 만초천 지류 ⓒ 김천수

박완서의 소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척결 척결 허지만서두 복원두 허들 않고 척결부터 허겠단 소릴 누가 믿남.’ 외국군의 주둔으로 점철된 용산기지의 역사는 종종 우리 민족의 치욕의 역사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치욕이라고 덮어놓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원하여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치유’일 것이다. 용산이 어떤 역사가 깃든 땅인지, 무엇을 회복할 것인지 더 깊이 사유하고 바라볼 때다.

글 : 녹색연합 이다예 정책팀 활동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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