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평화실현, 우리 모두의 지향이길

2020.09.03 | 행사/교육/공지

7월 마지막 주, 우(雨)중 입니다. 새벽까지 숨죽이던 먹구름이 아침부터 비를 쏟아냅니다. 겹겹이 머금은 습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다다르면 쏟아내고, 차면 넘치고 하는 것이 사람과 자연의 순리인가 봅니다.

‘녹색연합 4대 강령’ 중 이번엔 ‘비폭력 평화 실현’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비폭력’과 ‘평화’는 환경단체 규범으로는 어색합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일면 통하는 것 같아도, 실상 ‘비폭력’과 ‘평화’는 평화단체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비폭력’과 ‘평화’는 환경단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분명합니다.

가리왕산에서 설악산에서 제주도에서 그리고 도시공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환경 현안과 갈등은 차별에서 시작합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연은 매번 차별받습니다. 그 순간 녹색연합이 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언어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연을 대변합니다.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지역 주민을 대변합니다. 그렇게 자본에 포위된 현장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차별에 녹색연합은 저항합니다. 일상에서 차별과 폭력이 항구적으로 사라진 순간 우리 자연의 안전은 영속적일 수 있습니다.

분단된 한반도는 통시적 관점에서 처절하고 비통합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타이틀은 사실 지구상 초고밀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 견주면 한가한 수사입니다. 그만큼 확고한 군사적 대치로 우리 사회 전 분야는 악영향을 받고 있고 쉽사리 왜곡됩니다. 하다못해 국토를 중심에 둔 심리적 물리적 제한도 상당합니다. 왜곡은 폭력과 차별을 부추기고, 평화 자체를 위협합니다. 과감한 전진이 필요합니다. 정전협정 67년, 이젠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때입니다.

현세대는 미래세대의 시간과 기회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의 증거와 기후 위기의 징후는 사실 채무불이행에 대한 경고입니다. 미래세대의 환경권을 존중하며, 미래세대가 지속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즉 미래세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응당 해야 할 보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중함은 쉽사리 간과되거나 무시됩니다. 이런 경우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시민권에 기반한 시민 불복종 행동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이 순간에도 비폭력과 평화는 녹색연합 활동가들의 기본적은 행동규범이 됩니다.

폭력의 개념을 최대한 확장하면 제도의 강제성에까지 이릅니다. “‘계약이란, 칼이 없다면 말에 불과하다’는 홉스의 언급이 정확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한 한나 아렌트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규범의 강제성이 폭력이 작동하는 원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은 명징합니다. 여기서 제도권 정치와 시민운동 사이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시민운동은 폭력성을 전제한 규범의 작동원리까지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민 불복종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물론 사회적 규범은 중요합니다. 규범을 지키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독려해야 할 일입니다. 비폭력 평화를 지향하는 녹색연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규범이 작동하는 원리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가지 예로 비폭력과 평화를 녹색연합의 활동에 연결해봤습니다. 이 외에도 녹색연합이 지향하는 ‘비폭력 평화 실현’의 당위는 무수합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첨단을 살아갑니다. 문화와 기술에서 지금 이 순간은 질주의 가장 끄트머리입니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상황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에 없던 낯섦은 쉽사리 폭력과 소외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해를 침범하는 침입자로 인식할 때가 많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비폭력 평화 실현의 의미가 절실합니다. 그것이 녹색연합의 지향이고, 종국엔 우리 모두의 지향이길 희망합니다.

*이 글은 녹색희망 272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 정규석 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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