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닷새째 – 아직 남아 있는 꿈길, 대기리 가는 길

2004.05.17 | 녹색순례-2004

하루 종일 영서의 턱밑을 따라 갔다. 학교 지리시간에 배운 것처럼 동고서저형의 지형 특성 때문에 영동지역은 경사가 급해 턱밑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게 바른 표현일 게다. 하지만 영서지역은 백두대간의 주능선 바로 아래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턱밑으로 이어진 마을과 마을 사이의 길을 밟을 수 있다.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에서 출발하여 42번국도 따라 말고개와 갈고개를 지나 임계리 화성초교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유있게 낮잠도 즐길 수 있었다. 임계리에서 삽당령까지 가는 길은 마지막 평양말에서 삽당령 고개 마루 바로 아래까지 옛길을 밟아 보는 기쁨과 경이로움도 누렸다.

우리는 늘 백두대간을 논하면서 항상 주능선만 집착했던 건 아닐까? 하나의 기준에 지나지 않은 마루금에 집착하면서 진정 백두대간이 담고 있었던 수천 년의 문화와 역사는 모르거나 외면했던 건 아닐까? 아울러 능선에 바라보았던 일부의 경관이 백두대간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면서 주능선에서 벗어난 수많은 가지능선이나 골짜기에 담겨진 숲과 그 속의 생명들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이 아니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이번 녹두대간(녹색연합 백두대간)순례는 그런 점에서 분명 새로운 접근이자 발상의 전환이다. 산이 어디 주능선만 산인가? 가지능선과 골골이 이어진 자락 모두가 산이 아니었던가? 이제 백두대간을 바라볼 때 산 전체를 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비롯해 자연과 공존했던 추억을 온전히 이해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백두대간에 불어 닥친 개발의 열풍으로 천년이상 고스란히 이어온 삶의 모습이, 불과 20년이 채 안되어 통째로 거덜난 아픈 상처도 알아야 할 것이다.

임계리 임계초교 화성분교는 교정 뒤쪽에 50년이 넘는 마을숲이 펼쳐져 있다. 소나무가 주를 이루는 맨 끄트머리에 산신각도 품고 있었다. 태백부터 삼척, 동해, 평창, 강릉 같은 강원도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 어디나 아직도 산신각이 제법 남아 있다. 뻑적지근하고 우람한 큰 절집의 산신각에는 명함을 꺼내기가 옹색하지만 나름의 영험은 지닌 산신각은 그 자리에 오랜 세월 터를 잡고 앉아 있다. 다른 지역에는 주로 고갯마루에 자리잡고 있는데, 오대산 이남의 강원도 백두대간에서는 고개는 물론이고 마을 입구 골짜기 초입, 산자락 곳곳에도 세워져 있다. 특히 마을입구에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백두대간에는 아직도 10여 군데 고갯마루에 산신각이 남았다. 화령재, 문경새재, 고치령, 마구령, 박달재, 구룡산, 댓재, 대관령 같은 곳이 바로 그곳들이다.



임계리 화성초교를 뒤로 하고는 발품이 녹녹치 않은 시간이 이어졌다. 속 깊은 골짜기 끝자락 모두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이어져 차가 다니기에는 여유있고 편리하지만 걸어서 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인생사 간혹 그렇듯이 엎친데 겹친 격으로, 도로의 콘크리트 포장공사만 봐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계곡이란 계곡은 모두 콘크리트 옹벽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심통을 넘어 분노가 밀려들었다. 아무리 나라돈이 제 돈이 아니라도 이렇게 쓸데없는 곳에 쏟아 붓는 것은 상식에서도 용납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냥 두어도 좋을 1급수의 산간계곡을 영원히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리는 토목공사는 정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녹색연합은 뭐하나 이런 거 대응 안하고’라는 자책과 반문이 수없이 이어졌다.

태풍 루사와 매미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었다. 재해예방과는 별 인연도 없는 사업에다 제대로 된 검증이나 자문도 없이 마구잡이로 부수고 파헤쳐 콘크리트를 바르는 토목공사 때문에 난리가 났다. 죽어나는 말 못하는 어름치, 금강모치, 갈겨니, 버들치는 맑은 계곡에서만 살던 우리 물고기들이다. 일본도 과거 이런 짓거리들을 하다가 수달이 절멸하는 생태계의 비극을 경험했다. 수달이 살아가는 주된 서식처인 계곡에 사방댐이며 옹벽이며 직강화 냇가 공사 때문에 수달이 살기에 힘겹고, 더구나 먹이가 되는 물고기가 번식하고 산란하는 것에도 나쁜 영향을 끼쳐 결국 물고기도,

수달도 함께 동반 멸종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교훈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고 다시 복원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부 물고기만 되돌아 왔을 뿐, 수달은 끝내 일본 열도 어디에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걸었던 임계리의 깊은 골짜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도 누가 제대로 따지거나 들추어 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수천억 원의 재해복구 예산이 이런 식으로 세어 나가는 것이다. 정부나 여러 당들도 교만하지 말고 항상 낮은 데로 임하면서 자연생태계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정치하는 당신들은 과연 이런 산속 계곡에서 우리가 낸 세금이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이 오직 생태계를 파괴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무력감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임계리 골짜기 맨 위 평양마을에서 고개하나를 넘어 삽당령에 도착했다. 백두대간 등산로로 붙어서 삽당령까지 진행할까도 생각했지만 당초 계획대로 주능선을 벗어나 마을과 마을, 골짜기를 걸어보기로 하고 가지능선의 고개를 넘은 것이다. 임계리 골짜기까지 포장도로가 생기기 전 주민들이 다니던 고개를 찾아서 넘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은 탁월했다. 노면에 옛길의 흔적이 뚜렷했다. 이 길을 다녔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한 운치있는 길이었다. 마실 나가고 장보러 가던 길, 보부상의 봇짐이 오가던 길,

시집 장가가 가는 가마가 오가던 길, 그 길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다만 지나는 사람들이 적어 낙엽이 쌓여 있을 뿐이다. 고개를 오르는 길에 동의나물, 둥글레, 태백제비꽃 살포시 피어난 풀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머리 위에는 소나무, 당단풍, 고로쇠, 피나무, 졸참나무 같은 자연숲들이 서로 하늘을 먼저 보겠다고 비상하듯이 뻗어 오르고 있었다.        

삽당령에 도착하니 옛길의 아련한 기억은 일장춘몽이고, 또다시 자동차와 트럭이 “씽씽” 달려 배기가스가 휘날리는 포장도로와 마주쳤다. 삽당령 고갯마루에는 20억 원짜리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놓여져 있었다. 인간의 편리와 속도감에 대한 면죄부인가 아니면 그나마 속죄의 상징인가, 우리 모두 인간이지만 동물들과 자연에게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삽당령을 뒤로 하고 강릉 왕산면 대기리의 ‘푸른고원 산촌체험장’까지 오는 길은 옛길과 지금 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랐다. 20~30년 가량된 이 길은 비록 수해로 일부가 무너지기는 했으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이루어진 길로 여겨졌다. 소나무 터널을 지나며 조림한 낙엽송 터널이 나타나고 한두 필지 밭들이 이어지다가 또다시 신갈나무, 피나무, 물박달나무가 반겨주는 숲 터널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타도 좋을 길이다. 아직도 이런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맙고 반가웠다. 마음속에는 저절로 다짐이 하나 떠올랐다.

‘순례길 뒤에도 언젠가 이 길을 꼭 한번 와 봐야지.’

더불어 이제부터 푸르름이 이어져 여름을 넘고 나면 가을에는 어떤 빛깔일까, 그리고 또 겨울에는 어떤 풍광일까, 따라하기도 기억하기도 만만치 않은 온갖 새소리를 들으며, 다시 올 때에 대한 상상력이 펼쳐진 둘레의 숲이 내품는 깊이만큼이나 풍부했다.



해 떨어져서 대기리에 도착했다. 겨울이면 폭설이 온 마을을 고립시킨다는 동네. 눈이 많이 내려 대관령 영동고속도로가 막힐 때면 텔레비전에 눈에 지친 노루나 고라니가 마을로 내려오는 모습이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동네가 대기리다. 본래는 정선이나 평창으로 편입되었어야 정상인데 왜 영동의 강릉시에 영서의 동네가 편입되었는지 궁금하다. 별이 늘 총총한 곳 또한 대기리다. 하지만 별은 숨어 있고 밤공기가 서늘함을 넘어 냉기로 파고들었다. 대기리에는 봄의 절정인 5월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백두대간의 산속처럼 겨울 아니면 여름만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동네 대기리에서 오늘도 지친 다리 어루만지며 백두대간의 너른 품을 꿈꾸었다.  

글 / 서재철, 박경화

※ 현장사진은 녹색순례 2004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pilgrim.greenkorea.org/2004/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