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4일째] 제주의 고단한 역사를 품고 있는 중산간지대

2007.05.02 | 녹색순례-2007

제주에서도 가장 척박한 삶을 이어왔던 현장, 중산간을 에워 돌아간다. 녹색순례 4일째 순례단은 제주 민중들의 팍팍했던 역사가 서렸던 삶의 현장을 걸었다. 성산읍 온평리 해안마을에서 출발하여 성산읍 삼달리를 지나 성읍민속마을을 살펴보고, 표선읍 가시리를 지나서 남원읍 신흥리까지 구간이었다. 삶을 응축한 표현이 ‘문화’라 했던가. 아름다운 제주, 관광의 섬 제주와는 또 다른 힘겨운 노동의 역사가 응어리진 제주 중산간지역의 문화를 들여다 보았다.

제주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4.3 이전에도 팍팍했던 삶의 기억이 수백 년간 이어졌다. 제주는 본래부터 척박한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 진상하는 말과 귤을 위해 민중들의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말 목장은 조선시대에서 계속 확대되었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 전체를 에워돌며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조정에 공급하는 말 목장을 운영하였다. 논농사를 지을 수 없어 밭농사에 연명해야 하던 시절, 보리와 조 등으로 살았던 굶주린 농경의 세월이 있었다. 제주의 진정한 농경문화는 중산간지대에 펼쳐졌다. 평원에 가까운 초지와 관목숲이 펼쳐진 사이사이에 목장과 밭들이 어우러진 것이 중산간지대다.

순례단이 바다를 지나서 본격적인 중산간지대로 이어지는 길목에 해당하는 삼달리를 들어서자, 감귤밭을 비롯한 농경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달리는 흥미로운 문화공간도 자리잡고 있었다. 김영갑갤러리다.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 437-5, 옛 삼달초등학교 터.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아예 제주도에 정착해 버린 고독한 사진작가, 김영갑 씨의 갤러리가 그곳에 있다.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 씨는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다 아예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1985년 바람의 섬, 제주에 정착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같은 섬 곳곳을 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또,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람, 들판과 구름, 억새 같이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과 생활풍속을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사진은 아름답지만 그의 작업은 고독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그를 소개하는 책에는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것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만큼 힘겨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진작업에 몰두하던 어느 날, 근육이 점점 위축되는 루게릭병이 찾아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업해 온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2002년 여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열었다. 그의 열정을 아는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병생활을 한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에서, 그가 가장 사랑했고 열정을 바쳤던 제주섬에서 고요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생전에 그는 제주의 자연 중에서도 용눈이오름을 좋아했다. 늘 그곳에 앉아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을 담아 1,000점의 사진을 남겼고, 용눈이오름만을 전시한 사진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사진을 정리해 보니까 너무 부족해요. 정말 너무 부족해요.”

그것은 아마 제주에 대한 그의 열정이 아직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때문은 아닐까?

사진이 주는 감동에 젖어 예상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사진을 본 깊은 울림을 간직한 채, 순례단은 성읍민속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읍민속마을부터 국도나 지방도로가 아닌 농어촌도로와 비포장길로 연결된 따라 들어갔다. 지도상에는 지미왓으로 나와 있다. 중산간을 중심으로 한 제주의 중산간에는 여러 밭작물들이 경작되고 있다. 무를 비롯해 더덕, 감자, 당근, 심지어 당귀도 보였다. 경사지가 아닌 평지에 가까운 경사의 밭에 수천 명 규모로 더덕을 심은 모습은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삼나무숲에 둘러 쌓인 더덕은 햇살을 받아서 엷은 초록빛을 띄고 있었다. 상큼한 더덕향까지 바랄 필요도 없이 풍경만으로도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제주는 예로부터 농사짓기에 척박한 땅이었다. 논농사는 거의 없었고,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소규모의 경작지를 힘겹게 개간하여 조, 메밀, 콩 같은 여러 밭작물을 재배하여 연명하였다.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엉기성기 농경지를 꾸려갔다. 지금은 트랙터와 트럭 같은 기계화장비를 바탕으로 비료와 농약을 쓰는 대단위영농이 주를 이루면서 경작의 규모도 커졌다. 같은 대규모 밭 단지라 하더라도 강원도나 경북 북부지역은 산지에 둘러 쌓인 비탈이 급한 농지인데 비하여 제주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밭이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제주만의 혜택으로 작용하고 있다. 육지의 급경사에 대규모 조성한 밭은 큰비가 내리면 산사태와 토사유실의 원인이 되는데 제주에서는 그런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 고랭지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토사유실 문제는 해당지역 농민들의 농지유실을 넘어 하천오염과 재해확산 등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평평한 등고선을 그리는 제주의 밭들은 토사유출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순례단이 오후의 햇살 속에 걸었던 성읍-서귀포를 연결하는 16번 국도의 주변인 표선면 가시리와 남원읍 신흥리 일대에는 삼나무숲을 중심으로 그 안에 광범위한 감귤밭이 자리잡고 있다. 큰 도로에서 삼나무숲의 감귤밭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은 길이다. 비록 포장도로라 하더라도 1차선 콘크리트로 된 도로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농촌지원사업으로 조성되었다. 길눈이 아주 밝지 않으면 정밀한 지도를 들고서도 길을 잃기 쉬운 미로같은 길들이 감귤밭 사이로 형성되어 있다.

주변의 오름에서 보면 삼나무숲만 보인다. 제주의 모습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삼나무숲과 감귤밭이다. 감귤밭을 둘러쌓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길게 띠를 이룬 삼나무숲을 빼놓고 제주의 중산간지역 풍경을 말하기 힘들다.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제주 농촌, 즉 중산간 농경지대의 모습이다. 관광의 섬 제주에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다른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감귤밭과 삼나무숲이다. 제주의 농업은 작물이든 감귤이든 밭에서 이루어지며, 바람이 많기 때문에 밭과 밭 사이에는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 특히 감귤밭은 돌담과 함께 삼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한 삼나무가 지금은 30년이 넘었다. 키가 15m도 넘는 삼나무는 인위적인 조림을 통해 가꾼 숲이지만 이제는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풍광이 되었다. 생태적으로 숲의 생물다양성을 줄이고 단조로운 숲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난대림이 드넓게 분포한 제주도에서 단기간에 방풍림을 조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이제는 다양한 상록활엽수를 심어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숲의 다양성도 높여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설오름(238m)과 갑선이오름(88m)를 끼고 있는 표선면 가시리부터 남서쪽으로 자리잡은 진 남원읍 신흥리 일대까지 감귤밭이 드넓게 형성되어 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감귤농사는 제주의 중산간 주민들의 생존권이자 삶을 풍성하게 키워준 효자였다. 해안지역은 어업이었지만 나머지 중산간 지대는 감귤농사에 매달렸다. 입에 풀칠을 넘어 삶의 풍요를 꿈꾸며 많은 마을들이 감귤농사에 나섰다. 육지사람들처럼 밥걱정 안하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삶의 한숨을 돌리게 된 밑천이 감귤이었다. 이 깊은 감귤밭 사이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제주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대통령의 결단으로 제주도민들의 생존권이었던 감귤농업이 한미FTA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시장의 질서를 섬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미래의 제주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기로에 서 있다. 어떤 미사여구도 감귤농사 이후의 대안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지금 제주도 중산간 농촌은 절망일지 모를 한미FTA로 긴장과 두려움이 지하수처럼 흘러 대수층으로 모여들고 있다.


■ 성읍민속마을

조선 세종 5년부터 일제강점기인 1914년까지 지금의 군청인 정의현청이 있던 성읍민속마을, 1984년 6월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 마을은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정 당시는 정의현청을 중심으로 반경 1km를 지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이 민원을 넣어 1987년 24만 평으로 줄어들었으며, 현재도 더 줄여달라는 지역주민들의 요청이 있다고 한다. 정이현청을 중심으로 반경 1km로 정했다는 말에서 행정편의주의식 발상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역주민들과 대화나 지리와 지형, 문화특색을 고려하지 않으니, 끊임없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성읍민속마을에는 성곽을 비롯하여 동헌으로 쓴 일관헌(日觀軒)과 향교에 딸린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이 남아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마을 한복판에 있어 마을의 풍광을 더욱 고풍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것은 그곳을 들르는 관광객들에게는 큰 볼거리이지만,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여러 가지 불편한 삶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불편함을 참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문화마을단지를 만들어 성읍에 살고 계시던 분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해결의 방법이 아님은 곧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곧 티가 났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보기에도 겉모양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큰 매력은 아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세간살이와 살아가는 방법 등을 알 수 있길 원하나, 아직 그러한 내용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정부가 지원해 주는 것이 고작 이엉을 얻는 지붕을 갈 수 있는 금액정도라니, 그 이상의 기대를 바라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큰 욕심일 뿐이다.

강기숙 문화해설사의 이야기 막바지에 문화재 복원의 이야기가 나왔다. 문화재 복원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재료(재목)의 변형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집을 지을 때는 육송을 사용하지 않고 잡목을 사용하는데, 문화재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육송을 사용하기도 했단다. 보통 문화재청에 소속된 목수들만 복원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데, 원래 제주도에서 목수 일을 해 오던 분들은 문화재청에 등록되지 않아, 제주도만의 집을 짓는 방식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문화재의 복원, 문화재와 지역주민의 삶 등은 우리가 앞으로 꼭 풀어야할 숙제이다.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 관광지로 유명한 정도로만 생각했던 성읍민속마을에도 이런 여러 가지 숙제를 가지고 있었다. 제주의 문화와 역사, 4,3 항쟁의 아픔을 품고 있는 중산간마을엔 제주의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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