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 6일차] 최초의 김밭은 쇠붙이 공장이 되고

2014.04.26 | 녹색순례-2014

섬진강을 따라 남해바다로 걸어온 녹색순례단은 광양만 태인도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장쾌하게 뻗은 백두대간이 호남정맥으로 가지를 뻗고, 그 기운이 마지막으로 모인 곳. 삼봉산에 함께 올랐습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따라 듬성듬성 들어선 마을은 여느 산 아래 마을과 다를바 없어 보였지요.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무시무시한 연기와 소음을 내뿜는,  넓은 바다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공장 섬이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거신병을 만들어내던, 시뻘건 불을 뿜어대던 공장과 흡사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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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만들어낸 문명의 풍요 속에 살면서 우리의 편리가 여럿의 해를 등에 업은 혜택은 아닌지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4개의 모둠은 과거 태인도라 불리던 이곳 주민들을 만나보고 30여년전 제철소가 들어선 후 삶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전어를 쫓아낸 스뎅이 전어를 홍보하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550리를 굽이돌아 긴 섬진강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망덕포구. 망덕포구는 옛 사람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다압, 구례, 곡성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 역할을 하였고, 광양만을 한 눈에 파수(망)할 수 있는 위치의 망덕산이 있어 망뎅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섬진강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라 풍성한 어장을 형성하여 전어, 장어, 백합, 벚굴, 재첩으로 유명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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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로 유명한 망덕포구는 1982년 광양제철소 건립으로 그 명성이 쇠퇴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대형 전어 조형물이 망덕포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전어를 쫓아낸 ‘스뎅’이 전어를 홍보하는 모양새입니다.
아담한 망덕포구 마을길을 걷다 마주친 주민 몇몇 분들에게 섬진강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망덕포구에서 재첩, 벚굴을 많이 채취했었는데 이젠 바닷물이 계속 치고 올라와 재첩, 벚굴도 강 위쪽 하동으로 올라갔다”, “강가에서 들깨와 콩을 심어 지어먹었는데 지금은 강가 갈대밭을 도로와 데크로 포장하면서 못하고 있다.”는 대답들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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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 하는데, 왜 바닷물이 강으로 흘러들고 있을까요? 마지막에 만난 주민분은 “인근에 수어댐이 건설되면서 강물을 가두어 두니, 민물이 내려오지 못하고 바닷물이 올라가는 형태가 되었다”며 “그로 인해 주민들이 염도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하셔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섬진강 하류가 바다화되면서 기수역 위치가 상류로 이동하고, 서식하는 생물도 변하고 있습니다. 4대강 공사에서 제외된 섬진강만큼은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하구에서는 이런 상황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적 해우 꾸 묵을 때마다 생각이야 나지.
1640년대에 김여익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김양식을 시작한 곳이 바로 광양 태인도입니다. 30여년 전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김양식을 못하지만, 후손들은 매년 제를 지내며, 김 양식으로 인해 윤택한 살림을 가능케 했던 그를 기립니다.
마을에서 만난 70대 어르신들은 한입같이 제철소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직 김농사를 짓고 있을 거라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해우(김의 다른 말, ‘해의’의 전라도 사투리) 꾸 묵을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날 때가 있제. 참말로 징글징글했어. 화개에서 산죽을 사다가 추려서 어른 허리께까지 오게 섶을 만들어 썼어. 섶은 한번 만들면 한 2년은 썼지. 음력 8월에 섶을 꽂아 놓고, 두어달 지나서부터 김이 달라붙으믄 음력3월까지 김을 땄제. 살얼음이 어는 한겨울에도 물때가 오믄 한루도 쉴수가 없어. 온식구가 김밭에 매달렸네. 우리 애들한테는 아침에 일 안해놓고가믄 학교도 못간다고 소리소리 치기도 했고. 그러케 애들을 갈쳤어. 나는 여기서 나고 자라서 김만 뜯느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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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가 들어와 생계 수단이 사라져 살기 힘들었다는 답변을 기대하며 김농사 그만두고 살기 힘들지는 않으셨느냐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김 농사가 몸서리치게 힘들었다는 그 시절 이야기만 다시 돌아옵니다. 제철소가 생긴 후 시커먼 먼지가 많이 날린다는 말을 하면서도 진절머리나던 김밭 농사를 다시 하지 않은 것도 쇠붙이 공장 덕이라 생각하시는 듯 했습니다. 김밭에 대한 보상은 몇년치를 돈으로 받았다 하면서요. 다시는 김 농사는 안할란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시던 그 모습에 살림은 조금 넉넉했지만 잠시의 쉼도 허락치 않았던 당시의 혹독했던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들도 분명 알고 계시겠지요. 지금의 당신 삶을 지탱하는 것은 섬진강과 바다의 몇 년치 삶을 보상한 돈이 아니라 그 징글징글한 김밭에서 보낸 수십년 세월이었다는 것을요. 이제는 따뜻한 밥 한술에 바삭바삭하게 구운 김을 올려 먹을 때마다 잃어버린 30년 전 섬진강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말단 관직의 전우치가 관료들의 부정과 비리에 환멸을 느끼고 백성들을 구제코자 터를 잡을 만큼 살기 좋았던 태인도는 제철소와 산업단지가 들어오면서 더이상 어촌으로 불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도 소음과 분진을 피해 떠나 미래도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민들과 제철소, 산업단지 간의 오랜 갈등 끝에 몇년 전 클린태인협의회가 만들어지고, 기금이 조성되었다는 소식은 큰 성과이자 희망입니다. 아직은 마을 주민들의 복지를 위한 기금으로만 쓰이고 있지만 주민 건강 피해와 환경 모니터링에 대한 기금으로 사용처가 확대되길 기대해볼 수도 있으니까요.

몇년 후에 다시 태인도에 오게 되면 주민들이 설치한 대기 오염 측정망이 운영되고, 공신력있는 시민 연구기관과 협력해 체계적으로 측정한 데이터들이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지 않을까요? 주민들의 간절한 바람대로, 환경만큼은 이권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변화하길 녹색순례단도 간절한 마음을 보태겠습니다.

 

정리 : 산모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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