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한겨례신문] (이슈추적) 집중포화 맞는 ‘저장 포화론’ (2003/02/19)

2003.04.25 | 미분류

폐기장 건설 계획에 대한 환경단체의 비판… 유리화 공정으로 압축하면 저장공간 확보

“우리나라는 현재 18기의 원전이 가동 중에 있으며, 전력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방사성 폐기물은 발전소 내 임시 저장시설에서 보관하고 있으나, 2008년에는 저장능력이 한계에 도달한다. 폐기물 관리시설을 적기에 건설하지 못하면 원전 가동에 지장을 초래해 국가 동력인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정부는 1986년 이후 여러 차례 핵 폐기장 건설의 시급성을 강조해왔다. 애초 발표대로라면 이미 폐기물이 넘쳐나 원전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 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하기 전까지 폐기장 건설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가 2월4일 후보부지 선정 결과 발표가 나온 뒤 폐기장 건설의 시급성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원활한 전력 공급을 위해서는 폐기물 처분장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을 환경단체와 원자력계 일각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선 탓이다.

정부 주장대로면 이미 포화 상태

정부의 폐기장 건설계획에 대한 비판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먼저 폐기장 저장공간의 포화시기에 대해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6월 산업자원부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발전소 작업복이나 자재, 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의료용 방사능 물질 등)의 저장능력은 모두 9만9900드럼이다. 이 가운데 이미 저장된 용량이 5만9517드럼으로 2008년 울진원전을 시작으로 월성(2009년)·영광(2011년)·고리(2014년)가 차례로 저장능력이 포화상태에 도달한다는 게 산자부 전망이다.

그러나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반핵팀장은 “저준위 폐기물은 유리화 공정을 통해 부피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다. 이미 대전 환경기술원에서 연구개발을 마쳤으며, 오는 2004년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산자부가 유리화 공정을 거칠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고, 저장공간 포화연도를 계산했다는 주장이다.

사용후 핵연료인 고준위 폐기물 역시 마찬가지다. 산자부 자료를 보면, 고준위 폐기물로 분류되는 사용후 연료는 4개 원자력 본부에 있는 임시 저장시설에 모두 9803t을 저장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이미 5641t이 저장됐으며, 2006년 월성원전을 시작으로 울진(2007년)·영광(2008년)·고리(2008년)가 차례로 저장용량을 초과하게 된다는 게 정부쪽 설명이다.

그러나 원자력 전문가들은 “이는 기존 사용후 핵연료 저장조 용량을 증량하지 않았을 때를 상정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용후 핵연료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관해야 한다. 방사능 수준이 높아 혹시 일어날지 모를 핵분열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핵분열 억지물질(중성자 독물질 또는 독봉)을 투입하면 이 간격을 줄일 수 있다. 이럴 경우 조밀저장이 가능해져 폐기물 저장용량을 늘릴 수 있다.

안전성 무시한 공동 보관·처리의 문제

새로 가동을 시작한 원전에 있는 여유공간을 이용한 호기 간 이동도 가능하다. 이미 고리 1호기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3호기로 옮긴 사례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또 현재 사용하는 저장조 저장법을 철근이나 콘크리트 캐스킷을 이용하는 건식 저장법으로 바꾸면 단위면적당 저장용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산자부는 “조밀저장·건식저장·호기간이동 등을 통하더라도 2016년에는 저장용량이 포화상태에 이른다”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한 핵공학 전문가는 “사용후 핵연료는 해결책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현재 보관 중인 장소에서 옮기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나오는 폐기물은 현재 발전소 부지의 저장용량을 늘리거나 건설 중인 발전소가 완공되면 확보되는 저장공간으로 충분하다”고 잘라 말했다.

중저준위 폐기물과 고준위 폐기물을 같은 곳에서 보관·처리하겠다는 계획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정부는 “중저준위 폐기장은 영구시설이고, 고준위 폐기장은 중간시설”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고준위 폐기물과 저준위 폐기물은 방사능 수준이 100만배 이상 차이가 난다. 사용후 핵연료는 저준위 폐기물과 처리방식도 다르고 함께 저장·처리할 필요도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현재 우리나라가 가동하고 있는 원전은 모두 18기로 이 가운데 14기는 경수로 방식이지만, 월성 1·2·3·4호기는 모두 중수로다. 여기서 나오는 폐기물은 성질이 다르고, 이를 저장·처리하는 방식도 다르다.

동해안과 서해안 2곳에 폐기장을 짓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해 “폐기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위험성만 높일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황성원 청년환경센터 대표는 “국제적으로 핵 폐기물은 만들지 말고, 옮기지 말고, 파묻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해상수송로가 짧아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위험도를 줄이는 방법은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최종처리 방법을 마련할 때까지 사용장소에 보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원자력 전문가들 역시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폐기물도 싣고 내릴 때 가장 위험하다. 폐기장을 2곳에 나눠짓는 것은 위험을 2배로 높일 뿐이다”고 강조했다.

폐기물 처리비로 폐기물 양산

재미있는 것은 폐기장을 짓기 위한 재원이 현재로선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원전 해체와 폐기장 건설예산 마련을 위해 1983년부터 원전사후처리충당금을 조성해왔다. 전기료의 일부(1kW당 2~5원)를 떼내어 지난해 6월 말까지 적립한 재원은 모두 4조3673억원에 이른다. 그런데 자금관리를 맡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주)가 이를 모두 전용했다는 사실이 지난해 9월 국정감사 결과 밝혀졌다. 당시 과기부가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적립된 기금 가운데 2476억원이 폐기물 관련사업에 사용된 반면, 나머지 4조1200억원은 전액 원전건설에 사용됐다. 폐기물 처리에 쓰여야 할 공공기금이 오히려 폐기물 양산에 사용된 셈이다.

이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한수원의 기금 전용은 정부의 무분별한 원자력 발전 일변도 정책의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미국은 사용후 핵연료 처분은 연방 에너지부 책임 아래 기금이 축적·관리되고 있으며, 원전 해체비는 원자력규제위원회 통제 아래 발전사업자가 자체 관리하고 있다. 사후처리충담금 관리를 원전업자인 한수원에 맡길 것이 아니라 별도의 독립기구를 통해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월12일 울진에 이어, 13일에는 전남 영광에서 주민 8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폐기장 후보부지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군민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전북 고창과 경북 영덕 등 나머지 후보부지 지역주민들도 대정부투쟁을 선언하고,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15년여 동안 주민반발에 밀려 번번이 핵 폐기장 건설계획을 철회한 정부가 이번에도 낯설지 않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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