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10년의 기록-옥구염전] 소금이 온 자리는 스산하다.

2003.12.10 | 미분류

지난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후보는 전북도민의 정서를 달래기 위해 새만금 간척사업을 공약으로 걸었다. 그러나 취임 이후 경제부처에서는 간척사업에 대한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예산을 배정하기 않았고, 다시 5년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새만금 사업을 선거공약대로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여야는 200억원의 새만금사업비가 포함된 추경예산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시 5년 후, 시화호 오염사건은 간척사업이 야기하는 환경파괴의 역기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에 들어갔으며, 감사원은 새만금사업을 모든 면에서 총체적 부실이라고 결론지었다.

5년이 또 지났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공사는 계속하되 용도는 재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서울행정법원은 “정부가 내놓은 1989년 수질오염방지대책에 따른다고 해도 동진강, 만경강에서 유입되는 생활, 공장 폐수는 담수호의 부영양화를 초래해 농업용수 공급이 불가능하게 돼 농지확보와 수자원개발이라는 새만금사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인다”며 공사중지명령을 내렸다. 15년의 시간동안, 새만금간척사업은 철저하게 인간의 역사와 개발의 역사,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 유보, 강행되었다.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왕조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가려진 민중의 역사를 조명하며 현재화한다. 봉건과 근대의 과정은 왕조의 역사를 현재하는 모든 역사과정으로 환원하였다. 이제 21세기, 인간 이면의 생명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의 역사만을 위해 봉사한다. 인간의 역사를 위해 생명의 역사는 외면되고, 그 생명은 인간의 개발을 위해 희생된다.

새만금간척사업이 야기한 많은 칼날의 행위는 단연 일부 인간을 위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것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세계최대인 33km 방조제는 갯벌과 그곳에서 생계를 유지한 어민들을 외면했다. 칠산바다, 고군산군도의 조기와 청어의 역사는 말 그대로 역사의 화석이었고, 만선을 기원하며 갯제를 올렸던 성황당의 역사와 마고할매, 임경업장군의 역사는 매립되었다. 소금도 비슷한 역사의 운명에 처해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염전의 역사는 서편제의 소리 한 소절에 차츰 멀어진다. 한국염전과 옥구염전은 대한민국 최대의 소금밭이었고, 여름날 강렬한 햇볕과 바람을 가진 천혜의 소금 산지였다.

2003년 11월 초, 만경강 하구에 위치한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 옥구염전을 찾았다. 반듯반듯한 소금밭이 평야처럼 넓고, 염전지대를 가로지르는 길가에는 붉은 칠면초 야릇하다. 옥구1반 2반, 3반… 소금창고가 드문드문 서 있는 모양새가 시골의 외갓집을 찾아온 듯 서정적, 향토적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자욱한 매연층으로 인해 층층이 황홀한 도시의 석양처럼 아쉽다. 퇴폐적 아름다움이던가. 한 장의 스틸 사진처럼 각인된 소금밭 풍경은 ‘나 아름답지 않은가’ 하며 연신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겨울을 바라보며 한 염부가 부지런히 소금을 받고 있었다. 새만금 바닷물을 끌어다 언저리 저수지에 모아 위쪽부터 천천히 흘려보냈다. 햇볕에 졸은 바닷물은 거품을 머금으며 서서히 서서히 소금결정을 보냈고, 비스듬한 소금밭의 맨 아랫자리에서 ‘소금이 왔다’. 새만금 옥구염전의 마지막 ‘소금이 왔다’. 이로서 새만금 염전의 역사는 최후의 장면을 내어 보냈고,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레테의 강’을 건넜다.



첫눈이 왔다. 12월 7일, 전국은 한파로 꽁꽁 얼어붙었다. 그때, 옥구염전을 다시 찾았다. 쓸쓸한 소금밭에 버려진 소금창고, 2003년 9월에서 넘어가지 않은 달력, 강한 노동으로 허기진 염부의 배를 채웠을 밥상, 물을 끌어올리던 수차, 소금자루를 덮었을 폐타이어, 인적 드문 소금밭에 빗금친 눈발만 우리를 맞았다. 옥구염전 어은리 갯벌의 칠게는 추위를 피해 깊은 구멍으로 움츠렸다.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어새 삼형제가 먹이 찾아 바쁘다. 새만금에서 소금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33km 방조제는 더 이상 옥구염전에 소금을 보내지 않는다. 그것을 눈치챈 염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금이 온 자리는 스산하기만 하다.

1995년 세풍그룹은 ‘F1 그랑프리‘ 자동차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옥구염전 인근 한국염전에 자동차경주장과 호텔들의 건설계획을 세웠고, 유종근 도지사는 한국염전 106만 평을 준도시 지역으로 용도 변경시켰다. 2002년, 세풍으로부터 4억원의 뇌물을 받은 유종근 도지사는 감방으로 갔고, 연약지반에 건설하려던 자동자경주장은 취소되었다. 이제는 이곳에 골프장을 건설하겠단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시화호의 닮은꼴, 풀빵이고, 옥구염전은 한국염전을 닮는다. 이것이 배려없는 인간의 역사이다.

글 : 자연생태국 윤상훈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