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삼남에 내리는 눈

2005.04.04 | 미분류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땅의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 황동규의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전문 –

1.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포크레인 소리 요란한 강천산은 쉽사리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천산에 접어든 첫날은 날이 저물어 서둘러 하산하였고, 눈을 비비고 일어난 둘째 날 주룩주룩 자욱한 안개 속에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비가 그치고 다시 강천산을 올랐다. 그러나 웬걸,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는 더 깊어지고 사위는 온통 안개바다였다.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들어선 길에서 길이 끊겼다. 내려가니 바위사면이 이어지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잘못 들어선 것이다. 안개 속 정국의 갑갑한 시민들처럼 안개 낀 호남정맥 마루금에서 탐사대원들의 발엔 힘이 풀렸다. 철수가 결정되고 바위사면과 조릿대 지역을 힘겹게 통과하여 하산하였다.

내려오는 길에서 정상부에서도, 입구에서도 들려오던 포크레인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강천산테마파크 건설현장, 바위절벽이 많은 강천산의 한 절벽에 인공폭포와 공원을 만들기 위해 10여대의 포크레인이 바위절벽을 파내고 있는 중이었다.

내려오는 길은 수해복구와 테마파크 건설로 인해 계곡 전체가 파헤쳐져 있었고 물은 제 색깔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호남정맥 탐사대는 강천산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다시 셋째 날, 어제의 굴복이 자연의 힘 앞에서의 굴복이었다면 이번엔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사현장을 통과해 강천산 마루금으로 올라가려하니 관리사무소 직원이 길을 막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된단다. 이유를 묻자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군수가 직접 지시를 내렸단다. 그러면 안전하게 공사지역만 통과시켜주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다시금 말을 바꾸었다. 그것 말고 플러스 알파가 있단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고 군수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제발 물러서란다. 할 수 없었다. 속 보이는 행동에 속이 타지만 물러설 수밖에…. 속을 쉽게 열지 않는 강천산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탐사는 다시금 권력의 힘 앞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관리소의 말단 공무원의 뒤엔 시설관리사업소의 소장이 있고 또 그 뒤엔 군수가 있고 도지사가 있고, 강천산의 바위절벽을 파내는 포크레인 뒤에는 건설업체의 사장이 있고 도급을 주는 더 큰 업체가 있고 또 또 또…… 어쩌면 그 뒤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있고 또 그 뒤엔 돈을 교주처럼 숭배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나도 먹고 살아야죠’ 제발 돌아가라는 관리소 직원의 말에 묻어있는 비애처럼 강천산의 바위절벽은, 아니 자연은 세상의 말단이 되어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대평등이 있을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약한 것에 눈이 가는 세상을 꿈꾸며 지친 하루가 저물었다.

2.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호남정맥 4차탐사는 눈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난 탐사였다. 기상청의 예보를 비웃으며 쏟아지는 폭설로 자주 길이 막혔다. 고당산을 오르고 망대봉을 오를 때 쏟아지던 눈에서부터 괘일산을 향해가던 마지막 날까지, 눈은 우리의 길을 막고 자연의 힘을 보여주었다. 묵묵히 그 소리를 들을 수밖에…. 그리고 다시 꽃샘추위, 어느 날의 반팔이 하루가 가기 무섭게 두꺼운 외투로 바뀌고 장갑과 털모자가 다시 등장하였다. 기온에 속아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나는 가을개나리처럼 성급하게 봄을 노래한 우리들이었다. 아니 우리는 개나리보다 못한 놈이다. 기온에 적당히 기대어 자연의 힘을 우습게 아는 놈들이다. 꽃샘추위와 눈보라는 어쩌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봄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순백의 가루처럼 뿌려지는 눈(雪)같은 정갈한 눈(眼)을 가지고 꽃을 볼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봄은 오지 않는다고….

마지막 날에도 눈보라가 날렸다. 철수하면서 대각마을에서 바라본 호남벌엔 눈이 한창이었다. 동학과 오월 항쟁과 해방의 땅이자 학살과 눈물의 땅위로,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이제 우리가 그렇게 내릴 때다.

글 : 황완규 (시인/자연생태국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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