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 이야기..

2003.06.10 | 미분류

오랜만에 만나네요.. 또 한번 제 게으름에 반성. ^*^

오늘은 이곳 필리핀에서 지내는 우리 딸에 대한 얘길 해 볼께요.
우리 딸은 지금 한국 나이로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지요.
지난 2월에 저랑 같이 이곳에 와서 살고 있고, 이번 6월 20일부터는 이곳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간답니다. 아무래도 영어로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 것 같아 한 학년 아래로 택했거든요. 아참, 우리 딸 이름은 지민이예요. 정지민. ‘지혜로운 백성’ 이라는 의미로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제가 지어준 이름이지요.

지민이는 이곳에 와서 정말 여러 가지로 바뀐 점이 많답니다.

먼저 식사습관인데요, 어렸을 때부터 입이 짧아서 밥 먹는 시간을 가장 힘들어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거의 저랑 식사량이 비슷할 정도가 되어 버렸어요. 김치랑 된장찌개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한 끼에 겨우 두세 가지 일 뿐인 반찬에도 제가 도울 일도 없이 밥을 잘 먹고 있답니다.
이곳 필리핀 사람들의 식사는 밥에 반찬 한 가지를 놓고 먹습니다. 물론 잘 사는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식사를 할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여러 반찬을 놓고 밥을 먹는걸 보면 여기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며 놀랍니다. 무슨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느냐면서.. 이곳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난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 한국에 태어나서” 하는 딸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늘 하시던, ‘귀한 자식일수록(귀한 자식이 따로 있겠냐만은) 부족한 듯 키워야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바뀐 건 놀이습관인데요, 바로 놀이방법입니다.
한국에서야 여러 가지 장난감이며 놀 것이 많으니 걱정이 없었지만 여기선 마땅한 장난감이 없을 수밖에요. 얼마 안 지낼 생활에 무얼 사주지도 못하고 보니 지민이에겐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장난감의 재료로 변합니다. 한국에서처럼 만들어진 걸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가지고 놀기 위해선 모든 걸 자신이 만들어야 하니 그 과정도 아주 재미있는 놀이랍니다. 딸의 소중한 장난감 재료를 보면, 화장지속 종이기둥, 다 쓴 상자곽, 선물을 쌌던 포장지, 빈 된장 용기, 내 화장품 빈 용기, 모포, 베개 뭐 그런 것들입니다. 아마 예전 우리가 어렵게 살 때에 이랬겠지요?
문구점에 가서 스카치테이프랑 가위, 색지, 칼, 풀 등을 사 주었더니 아주 기발한 물건들을 만들어 냅니다. 제법 견고한 장난감 핸드폰이며, 거실이랑 침대까지 만들어놓은 인형집 등등.. 어떨 땐 나도 놀랄 정도로 잘 만드는데 아마도 만들어진 놀잇감보다 감성이나 지능발달에 훨씬 도움이 많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점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책을 아무리 권해도 잘 안 읽더니 이곳에선 내가 일을 하고 있느라 혼자 할 일이 없어지면 자기도 옆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지금 딸이 읽고 있는 책은 황대권 선생님의 ‘야생초 편지’라는 책입니다.
11살짜리가 읽기엔 쉽진 않겠죠? 그런데 여기 있다보면 한글로 된 책이 귀하니 한글로 된 책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거든요. 내가 사준 책이 거의 영어 동화책이기 때문에 그걸 읽기가 피곤하고 싫으니까 잡았던 책인데 읽다보니 내용이 재미있는지 작은 글씨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씩 집중을 해서 읽다가 내게 궁금한걸 물어보곤 합니다.
예를 들면 “엄마, 왜 이 아저씨들은 감옥에서 살아요?” 등등..
그래서 조금 어려운 정치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 하나 아주 중요한 변화가 바로 ‘생물에 대한 자연스런 인식’입니다.
이건 제가 적당한 표현방법을 찾지 못해 이렇게 썼는데, 쉽게 말하면 우리 주위의 벌레나 동물들에 대해서 자연스러워 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는 사람 말고 주요 식구가 3 종류 더 있습니다.
바퀴벌레와 개미와 도마뱀입니다.
바퀴벌레는 거의 새만한 크기의 징그러운 놈들이 심심치 않게 집 안팎에 출연을 해서 사람을 놀래키고, 종류도 다양한 개미들은 아예 같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워낙에 겁이 많은 지민이는 이런 기어 다니는 벌레들에 대해 기겁을 했었는데 이젠 하도 많으니까 “여기선 우리랑 같이 사는 친구들”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담담해(?) 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도마뱀에 대해선 두 놈들하고 반응이 조금 다릅니다. 이곳은 도마뱀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도마뱀 천지입니다. 이놈들은 화단이 있는 마당에 가장 많고, 거실, 부엌, 심지어는 간혹 목욕탕이나 침실에까지 나타납니다. 처음엔 나도 깜짝깜짝 놀라서 거의 기절할 상황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젠 그놈들이 생긴 모양새를 관찰하는 담력까지 생겼습니다. 물론 그놈이 위협을 느끼지 않게 아주 조심하면서 말이죠. 아마 이곳 생활이 아니었으면 지민이는 도마뱀이 사람을 무는 동물인줄 알았을 겁니다. 사실은 무척이나 사람을 무서워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지민이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다름’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이 지구상에 있고, 또 자기랑 다르게 사람들이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지민이에겐 아주 특별한 경험일 것입니다. 예전에 5살 땐가 길에 지나가던 흑인을 보고 ‘손 잡으면 뭐가 묻을 것 같다’는 말을 해서 한참을 ‘흰 것이 좋은 것, 검은 것은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주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선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런 편견이 깨어지니 아주 좋은 교육이라 싶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한국에서 깨닫지 못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니 그것도 또 하나의 외국 생활의 즐거움입니다.

한가지, 한국에서 아이들 데리고 영어연수 온 일부 엄마들이 이곳의 영어강사나 가정부를 막 대하는 걸 보면서 한참씩을 혼자 창피한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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