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수다에 동참하며 – 박경화

2003.08.19 | 미분류

저 쥴리엣이에요.
2주 전에는 ‘미스 박, 박경화’였습니다. ^__^
‘한국NGO아시아센터’ 2기 연수생으로 필리핀 퀘손시에 와 있습니다.
김혜애 국장님이랑 ‘빨간집’에서 살고 있죠.
가끔 녹색수다로 필리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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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여느 때처럼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운동을 해서 땀을 많이 흘리면 몸 속 분비물이 다 빠져나간다는데, 필리핀 날씨는 분비물이 쌓일 틈도 주지 않는 것 같다. 시원하게 씻어볼까 싶어 수도꼭지를 돌렸더니 ‘쪼르륵 똑똑’. 또 물이 안 나오는군, 쩝쩝. 점심시간과 저녁 준비하는 시간이면 정확하게 물이 안 나오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이 모양이다. 오늘이 더 특별한 것은 정전까지 되었다는 거다. BF빌리지 안에서 하숙을 하는 문 선생님 말에 따르면 근처에서 전봇대를 새로 세우느라 4시까지 정전일거란다. 반 나절만에도 땀에 흠씬 젖는데 씻을 수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니 시간 때울만한 꺼리도 없어졌다. 이 허전하고 갑갑한 마음을 전했더니 김혜애 국장님 왈,
“좋잖아, 기냥 잠이나 자자.”
6개월 먼저 적응한 여인네의 인생법, 나도 얼른 저 여유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즐겨야 하리. 씻지도 못하고 부스스한 두 여인이 웃고 서 있는 빨간집의 토요일 오후. 큰맘 먹고 야심찬 계획을 세웠던 토요일 오후를 몽땅 낮잠시간으로 투자했다. 이것은 분명 쉬라는 하늘의 계시리니…. 구름색이 짙어지더니 한바탕 시원한 비도 쏟아져 낮잠 자는 환경을 두루 갖추었군. 밖에는 저리도 물이 많은데 집안에는 물이 없다니….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길겠군.

복날이 지나간 8월 한가운데, 필리핀은 지금 우기다. 해가 나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시원스레 쏟아졌다간 다시 말간 얼굴을 내민다. 우리나라 장마철처럼 삼일 연속 비가 내려 이 더운 나라에서 빨래 말릴 걱정도 해 보았다. 빨래를 널었다가도 하늘이 어둡다 싶으면 ‘후다닥’ 튀어 나가야 한다. 비는 늘 ‘토톡토톡’ 시작하지 않고 ‘후두둑’으로 시작해선 혼줄을 내고야 만다. 그래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볕만 따가운 건기보다는 살만하다고들 한다. 구름 때문에 가끔 시원한 날도 있고,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지 않고도 견딜만한 날이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가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옷을 새로 챙기는 일부터 이불이며, 먹을거리며, 살림살이 단속까지…. 이제와 새삼 생각해보니 사계절은 긴장과 부지런함을 주었다. 풍부한 감수성도 주었다. 전화를 할 때면 소식을 전할 때면 언제나 날씨를 물어보는 것처럼…. 늘 똑같다는 것은 느슨함이 아닐까? 늘 이렇게 덮고, 늘 똑같은 꽃이 피고, 늘 똑같은 옷차림이라면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좋은 점도 있다. 얇은 옷에, 얇은 이불에, 샌들이면 충분하다. 덕분에 살림살이도 단출하다. 옷장이나 큰 가구도 필요없다. 필리핀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보니 어떤 사람이 필리핀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했단다. 더운 날, 매우 더운 날, 매우매우 더운 날, 매우매우매우 더운 날. 아시아센터 성리 간사는 티셔츠의 팔 부분을 다 잘라선 나시티로 만들어 입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티셔츠인데 모두 나시로 변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그 천까지 잘라내고 싶을만큼 후텁지근하다. 그래서 그만 자르라고 나시티를 사줬다나?

가끔은 지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고정관념을 다 버리고 아주 다른 사람으로 며칠을 살고 싶었다. 그 바람을 이곳, 필리핀 퀘손시에서 즐기고 있다. 즐긴다기보다 아직은 당황하는 순간이 많지만 모든 걸 새로 배우고 있다. 트라이시클을 타는 법, 요금을 내는 법, 어디에서 내릴지 내 의사를 전하는 말 배우기까지…. 5명이 함께 타는 트라이시클은 다른 사람들과 타느냐, 혼자 스페셜로 타느냐에 따라 값이 4배 차이가 난다. 택시는 거스름돈을 잘 내 주지 않으니 잔돈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가게를 찾아가는 법, 음식을 시키는 법, 돈을 찾는 법까지 배우고 있다. 위조지폐가 많아 항상 점원들이 돈을 불빛에 비추어 본다. 입맛에 맞는 음식 이름도 외워야 한다. 그리고, 대형건물에 들어갈 때는 여자 남자 따로 줄을 서서 가방을 열어 보여야 한다. 위험물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 때론 몸수색을 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소문날 일도 없으니 자유로운 것도 많다. 우리나라에선 좀 용기가 필요했던 나시티도 과감하게 입어볼 만하고, 끈 나시에 도전할 예정.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어본다. 우리 집으로 오는 튜터 분에게도 말을 걸고, 물을 배달하는 사람, 빨래를 배달하는 사람에게도 괜히 한 마디씩 말을 걸어본다. 돈 개념도 익혀야 하고,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져야 하니 좀 수다가 필요하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나효우 소장님이 연수기간동안 필리핀의 다양한 문화를 겪어보라고 하셨다. 아주 잘 사는 곳과 못 사는 곳, 게이들이 모이는 곳에도 가보고, 특별한 음식도 먹어보고, 이곳 문화와 풍습을 겪어보기 위해 모험심을 발동하라고 했다. 그리고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는 방법, 필리핀 현지 애인을 구하란다. 중요하지만 늘 미뤄두었던 일, 바로 그 일을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치안이 불안해서 혼자 다녀선 안 되고, 밤에는 무조건 집에 있어야 한다. 하나는 주고, 하나는 빼앗는 공평함이랄까?

어제(15일)는 필리핀의 시민단체인 CO-M의 피데스 총장님 댁에서 파티가 있었다. 우리나라 음식을 좋아하는 총장님이 아시아센터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초청해 주셨다. 같은 퀘손시지만 차로 한참을 달려서 간 그곳은 고풍스런 분위기가 나는 예쁜 집이었다. 언덕에 있는 주택가라 시원하고 조용했다. 김밥이며, 잡채며, 부침개며 먹을거리를 나눠서 준비해간 파티는 우리나라 음식들로 풍성했다. 자주 먹지 못하는 야채와 과일을 집중 먹어치웠다. 이런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평소 먹을 수 없는 것들로 영양보충을 하는 것, 인류 생존의 법칙이다. 우리나라에서 음료수로 한창 뜨고 있는 노란 망고가 여기선 무척 싼 과일이란다. 밤송이처럼 생긴 껍질 속에 하얀 달걀 같은 알맹이가 든 ‘랑보탄’이랑 껍질을 벗겨 먹는 ‘롱간’도 무척 달다. 바나나 종류인데 삶거나 튀겨서 먹는 ‘사바’도 참 맛있다. 가끔씩 오늘같은 파티가 있고, 금요일은 ‘Family Day’라고 해서 아시아센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술 마시는 날이란다. 필리핀에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한 잔, 생일 맞은 분이 있어 한 잔, 1기와 2기 연수생의 만남을 기념하며 한 잔, 아무 일이 없는 것을 기념하며 한 잔…. 겨우 2주가 지났건만 특별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인생은 긴 여행이라 했지만 여행과 생활은 첫인상에서부터 무척 다르다. 며칠을 다녀오는 여행길에선 낯선 풍경과 문화, 사람들의 표정이 강렬하고 신비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몇 달을 살아야 하는 이곳에선 그 낯설음이 먼저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익숙했던 것들, 그 맛, 그 물건, 그 장소, 그 사람들…. 옛 기억을 자꾸 더듬는 내가 물끄러미 서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야? 성북동 내 방인가 혼자 어리둥절해 있다가 목덜미로 젖어드는 땀방울을 느끼고서야 와락 정신이 든다.
앗, 도마뱀 녀석이 내 방까지 들어왔군. 재빠른 녀석은 커튼 사이로 얼른 숨어 버렸다. 도마뱀과 바퀴벌레와도 공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본의 아니게 많은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군. 내 방 바로 옆에는 옷 공장이 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그 곳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아주 작은 영세공장인데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들이 밤낮없이 일을 한다. 예전에 아르바이트 했던 옷 공장이랑 풍경이 비슷해서 볼 때마다 맘이 짠하다. 오늘도 야근인지 밤늦도록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를 틀어놓고 작업을 하는데 우리도 다 아는 팝송도 나오고, 따갈로그어로 부른 노래도 들린다. 디제이덕의 노래를 필리핀 가수가 다시 부른 노래도 나왔다. 가끔 커튼을 열고 몰래몰래 살금살금 엿보곤 한다. 아침 작업도 아주 이른 시간부터 시작해서 노랫소리에 잠 깨었다가 노래가 잦아들면 이젠 한밤중이구나 내 신경 더듬이도 슬금슬금 내린다. 몇 달이 지나면 저 노래가사도 귀에 들어오겠지. 저 아가씨들이 사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지. 피식 웃고 만다.

도마뱀 녀석, 어디로 숨었지? 안 보이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동침해야겠군.

2003. 8. 16. 필리핀 퀘손시 빨간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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