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중에서

2004.02.11 | 미분류

배가 남산만했을 때 어머니의 넉넉한 생명의 물의 품안에서 자라 이제 곧 태어날 아기에게 약속을 했다. 생명의 모태인 새만금 갯벌을 보전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말이다. 지금 뱃속의 아이는 8살이 되었다. 우리 딸은 자라면서 자주 새만금 갯벌에서 갯벌 친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뒹둘었고 5살이던 2000년 언니, 오빠, 친구, 동생 200명과 함께 새만금 갯벌 간척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새만금 갯벌지킴이 미래세대 환경소송을 냈다. 어눌한 표현이지만 온 영혼을 담아 ‘새만금 갯벌을 사랑합니다’고 한 딸 아이는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대통령 아저씨 새만금 갯벌을 살려 주세요’한다. 꼼지락거리고 뒤뚱거리는 게를 좋아하고 고둥이 그려내는 기다란 곡선을 쫒아 자신의 발자국 그림을 그 너른 갯벌에 그리기를 즐기고, 매끌매끌 안기는 뻘의 촉감을 좋아하는 아이는 이제 어눌함을 벗고 갯벌을 살려달라는 주장을 더욱 또렷하게 하고 있건만 새만금 갯벌의 생명은 더욱 위태롭기만 하다.

새만금 갯벌과의 만남은 내게 남 다른 각별함이 있다. 마치 나의 생명의 여신을 만난 듯 나는 그녀와 생명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90년 내가 환경운동을 처음 시작하던 때의 신명과 창조를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운동에서 쏟아냈다. 80년대 모든 것을 던진 내 인생의 전부이기도 했던 학생운동을 비롯한 운동권 시절을 지내면서 나는 환경과 평화 그리고 생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90년 새로운 환경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생명에의 눈 뜸과 생명체들의 상생의 질서를 온전하게 지키기 위한 나의 신념과 열정은 충만해 있었다. 배고픔도 잊고 춤판위에서 한판 신들린 양 춤추듯 자유로운 영혼은 역량이 허락하는 한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이후 바로 그 신명나는 창조를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하라고 외치는 나의 운동에서 다시금 만난 것이다. 새만금 갯벌 현장을 찾았을 때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너른 갯벌에 펼쳐지는 생명의 유희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다 알아낼 수 없을 듯 무한해 보였다. 그 너른 갯벌 위에 한 어머니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가무락을 찾고 한 무리떼의 갈매기들은 어머니에게 먹이를 구하듯 곁을 떠나지 않고 먹이를 찾으며 노닐고 있었다. 어머니의 호미가 닿은 갯벌은 검은 윤기의 잘 생긴 가무락을 수도 없이 드러내 주었다.

나는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만금 갯벌을 생명과 조화의 땅이요, 생명과 조화의 바다라고 불렀다. 사람과 생명이 함께 공생하는 곳, 사람과 모든 생명이 풍요로운 곳,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기르는 곳은 나의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모든 생명의 현재이며 미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앗아 가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시키는 것은 환경운동가의 당연한 책임으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정부관료들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98년 나는 농림부장관에게 영산강 4단계 간척사업을 백지화하는 마당에 왜 새만금 간척사업은 재검토를 하지 않느냐고 도전하였다. 전북도민의 미래와 희망을 저당잡아 자신의 정치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전북도지사에게도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리고 죽음의 시화호를 목격하면서 새만금 간척사업이 안고 있는 엄청난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엉터리 보고서를 내는 전문가들도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99년 정부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 들여 새만금 사업 환경영향 민관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재검토에 들어가고 새만금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91년 공사 착공 이래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잊혀지고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새만금 갯벌이 세상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잠시나마 포크레인의 굉음과 조여오는 방조제에서 자유를 얻는 그 순간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나의 여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나의 여신이여! 당신과 함께 기뻐하나이다. 새만금 갯벌 생명의 소리에 공명하는 지혜로 이끌어 주소서’

새만금 갯벌은 내게 생명의 울림과 감동만큼이나 큰 시련과 아픔을 주었다. 나의 운동의 길은 결코 쉽거나 평탄하지 않은 고난이 함께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시련 앞에 좌절을 겪거나 상처를 입기도 하고 패배감에 젖기도 했다.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에 실무자로 일하던 후배 운동가들이 심신이 지치고 상처를 입어 활동을 접을 때 그 아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북 지역에서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 얘기도 꺼내기 어려웠던 시절에 막 둘째를 출산한 아내를 뒤로 하고 지역으로 파견 나가 몇 달간을 지내며 계화도 어민들, 부안 농민회, 김제 농민회의 젊은 일꾼이나 전교조 소속 교사들 그리고 지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작당을 하며 늘 술에 취해 있던 김태호,  어린 나이와 짧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새만금 관련 실무를 맡아 성명서 하나 제대로 못 쓴다고 지적을 받아가며 연대단체들 눈치 보랴, 단체에서 요구하는 실무능력과 운동의 전략전술을 짜 내랴, 현장 지원하랴 쉴 틈 없이 일과 사람에 치여 그 어린 가슴에 맺힌 고통을 눈물로 쏟아내곤 했던 박정운, 나는 아직도 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새만금 갯벌에 갖는 열정과 사랑만큼 새만금 갯벌 현장과 운동 현장을 떠난 후배 활동가들에게 그 사랑을 온전하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습지보전 국제세미나를 통해 새만금 갯벌을 세계 NGO들에게 알리고 호주 브리즈번, 코스타리카에서 열린 람사협약 당사국총회에 참석하여 새만금 갯벌보전을 위한 국제 지지나 공동성명을 조직하기도 했던 이태화는 미국 델라웨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밝고 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쓸 사석을 위해 해창석산을 허옇게 까 부수는 것을 막으려 그 해창산 절벽에 7일간 매달렸던 조태경은 함께 일하던 지아가와 결혼하여 조하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지금도 나의 곁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정연경, 남호근 등 환경활동가들이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함께 하여 주었다. 새만금 갯벌살리기 운동이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면 이들이 풀어내 줄 것이다.

또 잊지 못할 분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고용중 선생이시다. 새만금 갯벌의 아름다움과 생사를 영상으로 담기 위해 늘 무거운 장비를 매고 다니시던 선생은 새만금 갯벌 현장에서 한참 영상작업을 마치고 다른 일정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외지에서 돌연사하셨다. 큰 아픔이었다. 고인의 작품인 석양마저 지고 난 새만금 갯벌을 담은 사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신 모양이다. 고인의 명복을 다시금 빌며 그토록 살리기 위해 애쓴 새만금 갯벌이 살아나 고인이 다 못한 명까지 살리라 믿는다.

낡은 개발패러다임에 절어 개발독재식으로 밀어 부치는 정부관료들과의 싸움은 결코 간단치 않다. 특히나 13년 이상 사업을 진행하여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거대한 방조제 공사가 막바지 단계이고 보니 늪에 빠진 듯 무겁고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2001년 5월 정부가 새만금 사업을 다시 강행할 때 사업 강행을 막아내지 못한 우리는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자기부정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고 끄덕도 하지 않는 정부방침에 폐업을 다시 폐기하는 패배감과 그 후유증은 오래도록 갔다.  

사업을 강행하는 정부와의 긴장관계 못지않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간의 연대와 주도권 관계에서 오는 긴장이다. 새만금 관련 활동을 제안하면서 만든 연대기구가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비판을 받아 해소하기도하고 민관공동조사단의 민간위원 조사결과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일방적으로 진행하였다 하여 공개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물론 연대의 기본은 협동하고 나누는 것이기에 잘못한 연대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지나친 단체들간의 주도권을 중심에 둔 다툼이나 긴장관계로 인해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과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운동이 수많은 시간과 사람들 속에서 지나왔다. 나의 열정과 행동이 있었고 또 함께 했던 많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었다. 그 열정과 숱한 행동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이제 새만금 갯벌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제 시민사회의 관심과 참여도 크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국민이 새만금 갯벌을 살리는 것에 동의하고 국제 엔지오가 3보1배를 하며 지지하고 있다. 4년 전에 미래세대 환경소송을 낸 아이들도 많이 컸다. 8살이 된 우리 딸아이는 갯벌이 짓는 생명의 살림살이를 이해하게 되었고 지방 출장이 잦아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도 새만금 갯벌을 살리는 일이라면 너그러이 엄마를 이해해 주고 격려해 준다. 그 당시 초등학교 5학년으로 소송문을 작성하여 읽었던 전수진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새만금 생명평화를 향한 3보 1배 마지막 날 시청 앞에서 4분의 성직자들에게 미래세대 인사말을 전했다. 미래세대 소송이후 4년이 지난 지금도 한치 앞의 이익만을 내세워 미래세대의 미래를 앗아가고 있는 어른들은 여전히 아이들의 눈에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밀물과 썰물이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태양과 달, 바람과 비와 구름이 주거니 받거니 만들어 낸 새만금 갯벌! 이 엄청난 생명을 짓는 역사를 알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한 치 땅과 논과 돈으로 이 무한한 생명을 바꾸겠다니 이제 그 어리석음을 멈추고 이토록 아름답고 무한한 생명의 깊이를 간직한 갯벌과 더불어 만들어 갈 전북의 미래를 그리고 아이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지금 생명의 그물처럼 짜들어 갈 일이다.

새만금은 더 이상 전북지역에 위치한 고정되어 있는 새만금 갯벌이 아니다. 내가 생명운동, 환경운동을 올곧게 하도록 기쁨과 고통을 함께 주는 벗이요, 나의 여신을 만나는 곳이다. 그리고 생명평화의 담론이 열리고 생명을 짓는 온갖 대안 보따리가 풀어지고 나눠지는 곳이다.

@ 이 글은 <새만금,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 돌베개 출판 / 풀꽃평화연구소 엮음>에 실린 필자의 글입니다. 이 책에 최성각 소설가 등 10여명의 분들이 새만금 갯벌에 관련한 좋은 글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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