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위기, 방향성 상실이 근본 원인

2006.05.22 | 미분류

이제 녹색주의를 이야기하자

최승국(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

시민운동의 위기, 시민사회의 위기라는 말이 대두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위기는 시민사회에만 있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위기의 징후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우리사회 전체가 위기상황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87년 민주항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한국사회는 형식상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지만 우리 사회가 바라는 개혁과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단체제에 입각한 낡은 냉전 이데올로기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재벌개혁도, 보수언론의 개혁도, 관료사회의 개혁도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민주화 세력의 열망을 업고 등장한 소위 ‘민주정부’들은 집권초기엔 각종 개혁 언어들을 늘어놓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 세력에 발목을 잡히고 그들이 내세웠던 개혁의 과제는 여지없이 뒷걸음을 쳤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뿐만 아니라 노무현의 참여정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어느 유명한 정치학자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로 대표되는 집권에 성공한 민주정부의 무능력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치세력들도 그 뿌리가 보수집단에 있기 때문에 근본으로부터의 개혁 자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일면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지자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여당의 지지도가 바닥에 머물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은 응답은 ‘여당이 무능력해서’라고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인권이 탄압되고 개인의 자유가 실종되었지만 그래도 강력한 국가가 있었고 경제성장이라는 그들이 세운 국정과제는 성공(?)리에 추진되었다. 그래서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향수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향수는 보수 집단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 만들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여정부의 개혁의지가 실종되었고 그들이 무능하다는 것은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바뀌고 집권당이 바뀌면 이러한 무능함은 사라지고 우리가 원하던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감히 확언하건대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다음에 집권할 세력도 거대 정당들 중 어느 쪽이든 그들의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있고 그들의 정책과 비전으로는 우리사회가 부딪히고 있는 한계를 돌파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성으로는 우리 사회가 원하는 개혁과제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으며, 그만한 역량도 확보할 수 없다.

그럼 우리사회는 이대로 나락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사회의 미래를 제대로 밝혀 나갈 수 있는가?

나는 우리사회가 현재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은 한국사회가 가야할 방향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80년대 분출되었던 수십만, 수백만 시민들의 열정은 ‘민주주의 쟁취’라는 단일 목표와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속에는 독재로부터의 탈출과 개개인의 억압된 자유를 되찾는 것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문제, 노동자의 권익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여성인권 문제 등 우리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을 포괄해서 해결하려는 의지들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염원을 담은 7, 80년대의 지난한 투쟁의 결과 외형상의 민주화가 달성되었고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새로운 정권이 창출된 것이다. 그러나 1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사회는 내용면에서는 별로 좋아진 것이 없고 사회는 다원화되어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사회는 퇴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국민들의 삶의 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고, 빈부격차의 심화, 실업자의 증가, 끝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 경기침체를 등에 업은 각종 개발지상주의 정책들…,  이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아무런 희망도 가야할 방향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민주화라는 오랜 숙원이 해결(?)된 상황에서 그 사회가 담아야 할 내용이나 새로운 방향, 목적을 찾지 못하고 가야할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이제 우리사회가 가야할 방향을 세워나가는 것이 절실하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를 올바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과 내용을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위한 담론을 형성하는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사회는 사회발전에 대한 제대로 된 논쟁이 억압되어 왔고 그렇기에 우리사회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담론형성의 기회가 없었다. 해방 후부터 고착된 분단이데올로기는 어떠한 진보 논쟁도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올가미로 탄압하였고 그 속에서 진지한 논쟁자체가 거부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마련된 각종 철학과 담론,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각 세력들이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고 사회주의는 물론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진보성을 가진 민족주의 세력까지 완전히 거세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심화되었고 조봉암의 진보당의 좌절과 4.19 혁명이 군사쿠데타에 의해 미완으로 끝남으로써 이후 20년간 어떠한 진보성을 갖는 논의도 공개리에 이루어질 수 없었고 진보세력들은 완전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 NL과 PD로 대별되는 치열한 이론 논쟁이 있었고 진보정당에 대한 시도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올바른 논쟁이 억압된 상황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의 진보세력들의 논의도 대중성과 논리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극단의 방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민주화를 맞았고 민주주의 쟁취를 목표로 했던 세력들은 다음의 과제(민주사회의 내용을 채우는 것)를 수행하지 않은 채 각자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가고 우리사회를 이끌어갈 담론도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사실 90년대는 담론, 특히 사회전체를 바라보는 거대담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경제위기를 맞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유령에 의해 또 다시 차분한 논의가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진보성을 갖는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제도권 진출에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심스레 우리사회의 진보에 대한 논의들이 수면위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논의에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 확립에서부터 사회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제법 다양하다. 그리고 요즘 눈에 띄는 사회발전 논쟁의 중심에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있다. 논쟁을 이끌어가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각종 진보성을 띤 조직이나 연구기관들이 사민주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고 이제 시민운동 영역에까지 사민주의 철학이 기본 이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고 일부 단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민주의로 천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논쟁이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대두되는 대부분의 논쟁이 과거의 논리, 낡은 진보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21세기는 생명의 시기, 환경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도 환경운동 진영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주류 흐름에서 이러한 개념정의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개념은 구호에 머무르고 있다. 보수 정치권이야  사회발전에 어떤 비전도 갖지 않고 그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기존의 진보논쟁을 넘어서는 생명의 가치를 담은 철학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칭 사회발전을 고민하고 진보를 고민하는 진영은 달라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논의에도 생명이나 생태, 녹색의 이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찾아보기 어렵다. 간혹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사민주의를 포함한 그간의 진보진영의 담론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철학과 논점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낡은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담론이 생명이나 생태계를 중심으로 한 지구 전체의 문제에 대한 근본 고민을 담고 있지 못하다면, 이런 방식으로는 진정한 역사와 사회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인간을 위한 진보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만을 위한 진보가 정말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에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을 보더라도 인권의 향상과 사회 전반의 진보는 우리에 비해 많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회가 정말 올바르고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쉽게 긍정의 대답을 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민에는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과 모든 생명들의 보금자리인 생태계를 어떻게 잘 보전할까에 대한 우선순위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5만불에 이른다고 한들, 또 인간을 둘러싼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다고 한들 생명의 가치가 무시되고 그들이 발붙이고 살아야 할 자연환경, 생태계가 이미 사람들의 생존을 허용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인간중심의 진보는 더 이상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없다. 진보를 구성하는 가치의 한 중심축으로 생명과 생태가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만의 행복추구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가치가 존중되고 이들이 구성하는 생태계의 순환이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류의 행복도 훨씬 커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여 나는 우리사회가 시작하는 담론의 형성을 위한 장을 다시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무엇이 올바른 진보인가? 이제 녹색주의를 이야기하자.>

물론 녹색의 진보, 녹색주의가 아직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환경의 가치만으로 사회를 올바르게 발전시켜나갈 수 없음을 잘 안다. 생명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녹색주의는 우리사회가 그간 질문해 왔던 모든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고 그 속에서 얻어진 답을 통해 우리사회의 상을 만들어 나가는 시작이자 그 완성의 추구이다.

<이 글은 시민의신문 5월 22자 2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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