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백두대간] ⑥ 백두대간, 정말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네요

2015.10.27 | 백두대간

백두대간 환경대탐사, 700km를 걷다.

60일동안 꼬박 걷습니다.

도상거리 701km.
강원도 고성 향로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약 6,000장의 야장을 쓰며, 백두대간 마룻금 훼손실태 조사를 합니다.

녹색연합은 12년 전 걸었던 그 길을 똑같이 걷고,
다시 한번 우리 모두의 백두대간을 마주하고, 백두대간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전하고자 합니다.

[28일차] 2015년 10월 4일 (일) 맑음

구간: 벌재재~폐백이재~감투봉~황장산~차갓재
거리: 8.1km
걸음수: 11,100걸음

오늘 조사 구간은 벌재재부터 차갓재까지이다. 다른 날에 비하면 구간 길이는 짧지만 감투봉~황장산은 바위가 매우 험한 구간 중에 하나이다.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험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벌재재부터 시작되는 월악산 국립공원은 이름에 걸맞게 높은 난이도를 가진 곳이다. 생태통로 위 비법정탐방로를 따라 이번 백두대간 탐사 4번째 국립공원인 월악산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심한 오르막 경사 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다보니 어느새 장쾌한 조망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산 속 깊이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왼편으로 마을을 바라보며 바위 길을 계속 걸었다. 처마바위가 쭉 펼쳐져 있는 봉우리를 넘었다. 탁 트인 시야가 계속 됐다. 맑은 날씨 덕에 주위가 너무도 잘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월악산은 아직 본격적으로 단풍이 들지 않은 듯 싶었다. 태백산~소백산과 다르게 숲의 계절이 주는 느낌이 곧 바로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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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에 들어왔다. 조금 걷다보니 월‘악’산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가 걷는 길이 모두 바위 길처럼 느껴졌다. 바위에 오르자 황장산과 저 멀리 월악산국립공원의 바위지대가 보였다. 바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황장산으로 향했다. 황장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차갓재로 향했다. 차갓재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희미했다. 다른 소로와 헷갈렸다. 내려가는 길 또한 바위가 섞여 있었다. 바위 능선에 오르니 오늘 목적지인 마을이 보였다. 소나무 조림지를 지나 차갓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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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 없는 바위 길과 우뚝 솟은 바위들. 오늘 그리 길지 않은 구간이었지만 월악산 국립공원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차갓재에서 마을로 내려오니 독특한 카페가 있었다. 동굴카페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폐광을 방치하지 않고 카페로 꾸며 놓은 곳이었다.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문 앞을 서성이다 숙소로 향했다. 백두대간에 있는 광산들이 생각이 났다. 우리가 보고 온 자병산을 비롯해 앞으로 마주할 문경 고모치광산, 육십령채석광산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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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차] 2015년 10월 5일 (월) 맑음

구간: 차갓재~대미산~부리기재~꼭두바위봉~마골치~포암산~하늘재
거리: 19.5km
걸음수: 29,809걸음

오늘 조사 구간은 차갓재~하늘재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살짝 어스름한 숲을 지나며 어제 도착 지점이었던 차갓재로 향했다. 차갓재에서 하늘재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기는 했지만 험한 구간이 없이 완만했다. 약 30분쯤 걸으니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 도상으로 거리를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거리로 계산한 지점은 조금 더 가야 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이제 대략 백두대간의 반이 지났다는 것이다. ‘벌써 반이나 지났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참 간사하게도 ‘아직도 반 밖에 안 지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이 지났다는 이정표를 보니 탐사를 시작했을 때 가졌던 고민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에서 백두대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마룻금을 온전히 걸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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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산~부리기재를 거쳐 꼭두바위봉으로 향했다. 대미산까지는 길이 완만하고 괜찮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시 바위지대가 시작됐다. 꼭두바위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높고 험한 바위 길이었다. 밧줄을 타고 넘어야 하는 바위지대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밧줄을 타며 바위를 넘는게 조금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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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바위봉으로 가는 길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분을 만났다. 우리와 똑같이 진부령에서부터 남진하고 있었다. 저번 두타산~청옥산~댓재 구간에서 만난 분이었고, 고치령에서도 잠시 만났던 인연이었다. 그 분은 우리에게 꼭두바위봉 표시석을 보았냐고 물어봤다. 다른건 몰라도 정상 표시석은 꼭 찍어야 한다고 했다. 왔다는 것을 인증하기 위해서이다. 저번에도 고치령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준 것이 기억났다.
시간이 좀 늦어 부지런히 걸었다. 마골치에 도착했다. 마골치~벌재재 구간은 비법정탐방로라는 국립공원 안내판이 보였다. 어제, 오늘 이어서 꽤 긴 구간이 비법정탐방로였던 셈이다. 법정 탐방로가 시작되면서 달라진 것이 있었다. 하나는 이정표가 생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탐방압력으로 인한 훼손의 정도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벌재재에서 마골치까지 오는 길은 험하긴 했어도 탐방압력으로 인한 훼손은 별로 없었지만 마골치에서 포암산으로 향하는 길은 탐방압력으로 인한 훼손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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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암산 정상에서 하루가 지나는 풍경을 보았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드는 풍경. 백두대간이 땀흘리며 오른 사람들에게만 선사해주는 특별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재로 내려오는 길, 아름다운 풍경과 큰 소나무가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큰 소나무 아래에서 남은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훼손이 심했고 바위가 많아 내려오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해가 져버렸다. 하늘재샘터부터는 어두워져서 랜턴을 키고 걸어 하늘재까지 내려왔다. 어두워진 하늘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원팀이 무척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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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차] 2015년 10월 6일 (화) 맑음

구간: 하늘재~모래산~탄항산~평천재~부봉~마패봉~조령(제3관문)
거리: 10.5km
걸음수: 15,503걸음

이른 아침, 하늘재에 도착했다. 어제 하늘재샘터부터 어두워져서 조사를 못했기 때문에 다시 샘터로 올라가 조사를 시작했다. 아침에 보니 내려오는 길 등산로 훼손이 심각했다.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퍼져있었고, 뿌리노출 등 훼손도 심했다. 밤에는 볼 수 없었던 시설물들도 많이 있었다. 하늘재로 내려와 안내판을 보니 오늘 가야할 마패봉 구간은 난이도가 ‘어려움’이었다. 백두대간 탐사를 진행하면서 하루도 쉽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어렵다는 설명을 보니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하늘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비석이 서있었다. 하늘재의 본래 이름은 계립령이라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다왕 3년(156년)에 이 고갯길을 처음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계립령은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갯길인 셈이다. 하늘재는 조선시대 말기 이후, 어쩌면 그보다 훨씬 후대에 생긴 이름이라 한다. 1800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을 이어온 내력답게 하늘재 고갯길에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와 문화가 많다. 하늘을 찌를 듯한 하늘재 비석을 뒤로하고 마패봉으로 향했다.
하늘재~모래산~탄항산 구간은 어느 곳보다 훼손이 심각했다. 여태까지 본 등산로 중 가장 심각한 훼손이었다. 등산로 곳곳이 파이고, 무너져 내려 있었다. 훼손의 정도가 심해 걷기도 힘들었다. 특별한 대책이 정말 필요해보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탄항산 정상에서 지친 몸을 쉬어주면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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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봉삼거리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벗어나 잠시 부봉에 들렸다. 부봉까지 오르는 바위 길은 험했다. 짧은 구간인데도 밧줄을 3번이나 타고 올라야 할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부봉 위 넓적한 바위지대에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내려왔다. 동암문을 지나면서부터는 등산로 상태도 괜찮아졌고, 길이 완만해졌다. 또한 등산로 주위로 성곽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왠지 모르게 성곽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마패봉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패봉에서 바라본 석양은 마치 한편의 산수화를 보는 듯 했다. 조금 어두웠지만 문경새재 일대가 훤히 보였다. 우리는 잠시동안 석양에 취한 뒤 서둘러 조령 제3관문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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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차] 2015년 10월 8일 (목) 맑음

구간: 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조령(제3관문)
거리: 9.9km
걸음수: 14,318걸음

오늘 조사 구간은 이화령~조령(제3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하늘재~조령~이화령은 유명한 고개인 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중 문경새재는 이름에 대한 해석부터 다양하다. 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라거나, 억새가 많이 우거진 고개, 또는 서울로 가는 제일 빠른 샛길이라는 뜻으로 새재라 한다는 말이있다. 또한 계립령(하늘재)길을 두고 새로 닦은 고개이므로 새재라 하였을 가능성, 혹은 계립령과 이울리재(이화령) 사이에 놓였으므로 새재(사이재)라 불렀을 가능성 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새재는 영남 지방에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이었다고 한다. 새재를 비롯해 죽령, 추풍령으로도 한양을 갈 수었지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새재로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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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아홉 개의 ‘나랏길’이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길은 한양에서 출발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아홉 개의 나랏길 가운데 문경 새재길이 가장 큰 길이었다. 고갯길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것은 그 고갯길이 연결하는 양쪽 고을의 크기로 구분하는데, 새재 길 양쪽 고을들의 규모가 제일 컸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길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이며, 가장 큰 고개 역시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지나는 추풍령고개이다. 그 동나 시대에 따라 가장 큰 고갯길은 변해왔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계립령(하늘재)이 가장 큰 고개였고,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가장 큰 고개는 새재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이화령에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이화령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추풍령으로 변천해온 것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향했다.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현재 2개가 있었다. 이화령생태통로 위에서 출발하는 길과 그 바로 아래 정자에서 오르는 길. 두 길 모두 가다가 만나긴 했지만 생태통로쪽 길이 좀 더 짧았다. 조령샘터에서 샘물 한 모금하며 휴식을 취한 뒤 조령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간벌의 흔적이 있었고, 옛날 돌계단 위로 나무데크계단이 생겼다. 경사는 심했지만 그래도 계단 길이라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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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을 넘어 신선암봉으로 가는 길은 바위암릉지대였다. 양 옆 깎아지른 절벽 길 가운에 능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 가야만 하는 구간이었다. 이따금 밧줄을 잡고 낑낑거리며 오르기도 했다. 신선암봉 이후에도 암릉구간은 끝나지 않았고, 더욱 심해지는 듯 했다. 바위가 섞여 있는 등산로를 걸으며 점점 무릎이 아파왔다. 그래도 힘겹게 바위에 올랐을 때의 보상만큼은 확실했다. 온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장쾌한 조망이 주는 감동은 이 곳이 아니면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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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 제3관문에 도착했다. 새재 고갯마루에 지금과 같은 관문이 설치된 것은 조선 숙종 때이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한강유역을지키는 백두대간의 옛 관문, 즉 철령이나 대관령, 죽령관 가운데 유일하게 관문이 그대로 복원되어 남아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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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는 길, 새재를 비롯해 문경쪽 백두대간은 참으로 험했다. 능선만 걷는데도 어렵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백두대간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옛날에는 하늘재, 새재, 이화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감히 넘어볼 생각 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산에 대한 경외감이 생겼을 것이다. 백두대간은 쉽게 넘고,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현재 백두대간 고갯마루를 도로로 쉽게 넘을 수 있는 시대. 백두대간을 넘으면서 점차 장엄한 백두대간의 모습을 잊은 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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