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융희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노융희 녹색연합 고문님께서 향년 91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노용희 선생님은 1991년 녹색연합의 전신인 배달환경연구소가 창립되던 때부터 1999년까지 공동대표로 이후 고문으로 녹색연합과 늘 함께 해 주셨습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초대원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공간에서 환경을 가르치는 일에 몸담으셨고 녹색연합을 비롯 한국환경마크협회, 한국환경과학연구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시며 우리 사회에 생태적 가치와 실천이 자리잡는 데 앞장서 오셨습니다. 선생님의 님을 추모하며 2010년 작은것이 아름답다에 실린 우리의 영원한 녹색스승 고 노융희 님 인터뷰 기사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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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스승

글 / 김기돈 (작은것이아름답다 글모듬지기)

바람이 세차다. 걸음을 떼서 한 걸음 옮겨 놓는 일조차 버겁다. 하지만 흔들림이 없이 가지런하다. 뿌리 깊고 품이 넓어 너그러운 버팀이 된다. 셈하지 않고 지레 포기하지도 않고 끝까지 믿고 기다린다. 어느새 바람 잦아들고 함께 내딛는 발걸음이 처음과 다르지 않다. 맑은 샘이 끊임없듯.

‘초대’라는 자리가 말해주는 것

서울 이태원 보건동에 있는 나지막한 옛 양옥 이층집, 커튼, 책장, 꽃병, 액자, 모두 40년 그대로다. 반평생이 깃든 것들이 어디 물건뿐일까. 그 안에 담긴 격랑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관계 맺은 인연들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을 들고 났던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삶이 녹아들어 있을까.

노융희 님은 1952년에 휘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비롯해 다양한 공간에서 환경을 가르치는 일에 몸담았다. 수많은 변혁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늘 변화 앞머리에 있었다. 지내 온 그의 직위를 보면 유독 ‘초대’라는 글자가 수없이 많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만들어 가는 외롭고 힘겨운 개척자 역할이었다. 특히 녹색연합과는 1993년 태어나던 때부터 공동대표로, 그 뒤로는 고문으로 함께 걸어왔다. 환경운동의 든든한 언덕이자 버팀목이었다.

언제나 무엇이든 겉핥기로 다가서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근원을 파고들어가 대답을 찾았고,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동기가 있는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전체를 헤아렸다. 막연하게 다가서면 대체로 막연한 상황을 만들게 되고, 해결의 접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이의 걸음은 곧 새로운 길이 되거나 변화의 조짐이 되곤 했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1970년대는 환경에 대한 논의를 성장의 걸림돌 정도로 취급했던 개발독재 시절. ‘공해’라는 시각으로 현상만을 이야기했고, 1963년에 만든 ‘공해방지법’이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이는 나타난 현상에 머물지 않고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강력한 법으로 환경오염을 규제하고 감시하며, 개발할 때 환경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근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환경관련 법도 없고 환경부도 없을 때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으로 시대를 이끌었다.

그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을 경계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 환경문제에 다가서는 방식은 철학에 바탕을 둔 사회의 의지문제라는 것을 늘 재확인했다. 늘 법과 제도라는 밑그림을 그리면서 행동하고 대안을 이야기했다.

전체를 보는 눈

노융희 님은 형법을 공부했으나 우연찮은 계기로 ‘지방자치’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시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전체를 조망하면서 도시계획을 해야 한다는 시각을 열어가게 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 ‘도시와 지역계획학과’를 만들고 도시환경을 본격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시를 볼 때 토목하는 사람은 도로만 보고 건축하는 사람은 건물만 봐요. 도시라는 생명체 전체를 못 보고 있는 거죠.”

1970년대는 도시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지만 시골행정이나 도시행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체계를 가지고 운영했다. 도로 내고 공원 만들고 집 짓는 것이 도시계획의 전부인 시대였다. 도시가 환경, 정치와 경제, 문화 영역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체를 아우르는 계획 없는 개발과 팽창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을 예견했다.

“환경이란 말조차 꺼려했던 개발성장 정부도 국제 관계 속에서 ‘공해문제’를 덮어만 둘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만드는 일을 승인했던 배경이 아닐까 싶어요. 공해문제를 넘어서 도시와 지역계획, 도시설계, 조경, 환경관리, 공해관리를 아우르는 환경문제를 보도록 방향을 세웠으나 민감했던 환경과 공해 전공만 빼고 우선 발족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환경’이란 말을 넣게 된 것은 앞으로 많은 여지를 남긴 거라서 의미 있는 전환이었다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환경개념이 관련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폭 넓고 중요한 개념인데, 이러한 인식이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환경학 분야가 단지 ‘피피엠’만 따지는 기술 분야가 아니라 종합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 현대과학의 지나친 세분화는 큰 오류를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한 조각씩 들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연구하지만, 조각과 조각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만들어 내는지, 어떻게 전체를 이루는지 못 본다. 멀리 내다보고 높이 올라 웅장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우람한 숲과 산줄기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눈이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주제로 인간환경회의가 열리던 즈음에 그는 ‘환경을 무시한 대가로 얻은 당장의 번영은 훗날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 예견했다. 철저한 반성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면서 정부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무엇보다도 환경에 대한 생각은 문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요. 서구문명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해온 문명이고, 자연 정복의 역사였거든요. 자연 속에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이 주변 환경을 무엇이든 만들고 소비하기 위한 재료 정도로 취급했어요. 이렇게 과학과 기술로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을 위한 물질의 풍요를 쌓는 것을 어리석게도 진보라고 생각해왔어요. 사실 지금도 여기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어요.”

1999년 정부가 그린벨트 해제 계획을 발표했을 때, 환경원로를 직접 조직해 성명을 내고 ‘그린벨트 해제에 반대한다!’는 펼침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도시의 허파이자 난개발을 지켜온 마지막 환경의 보루인 생명벨트를 무너트리면 급격하게 황폐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국민정부 시절 동강댐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도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대통령에게 직접 동강댐 건설 백지화를 제안할 기회가 있었다.

“환경문제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것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했어요. 강을 막았을 때 자연을 수몰시킨 것 말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지, 과학으로 해롭지 않다는 것을 검증할 수 없다면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어요.” 2004년 말에는 “환경철학이 부재하고 환경비전과 환경정책을 후퇴시키며 과거 개발과 성장주의로 가고 있는데 환경단체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라며 환경운동 단체들이 환경비상시국을 선언하고 개발정책에 대응하도록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아울러 환경문제는 국가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국가, 지구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환경문제를 위해 한국과 일본, 중국이 함께 가야 해요. 지역중심 국제 연대가 활발한 지금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특히 우선 공통 이해관계인 환경의제를 중심으로 연대해야 해요. 모든 문제를 지금 시각에서 보지 말고 미래 시각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혜안이 필요해요.”

먼 여행길을 열정 있게 걸어온 뒤 새롭게 떠날 사람들에게 당부하듯, 천천히 또박또박 약도를 챙겨주듯 그이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간절하다.

참되고 사람답게

노융희 님은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다. 어머니 품 같은 묘향산 근처에서 나서 자랐다. 눈만 감으면 만져질 듯 선명한데 떠나온 지 벌써 70년. 통일은 그저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절실하게 바라는 현실이다. 아버지는 부농이었고 부족함 없는 철부지였다. 일제 강점기 때문에 서울서 중학교를 다녔고, 해방되던 해 4월 졸업을 한 뒤 고향에서 지내던 이듬해 38선 이북지역에 소련이 주둔하면서 토지개혁으로 토지는 몰수되었다. 형이 있는 서울로 내려온 뒤 분단되어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했다.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형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사과행상, 전매품인 소금을 지방으로 가서 쌀과 바꿔 팔아 생계비를 얻고, 껌과 담배도 팔고, 신문도 돌리고, 닥치는 대로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했다. “본전도 못 건지고 썩어버린 사과를 앞에 두고 형과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이런 생활을 통해 크게 변했어요. 눈물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투혼만 남게 되더라고요. 돌아보면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저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이가 몸으로 터득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람을 믿는 것이고 참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나 자신을 긍정하고 그만한 크기로 상대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사람답게 하는 거죠. 삶을 긍정하는 힘과 용기가 필요해요.” 낯선 것 앞에 서는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개발주의 문명에 맞서는 일은 거창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대안이 되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의 뿌리 깊고 장엄하면서도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도 품어내는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지금의 문명이 바탕으로 생각해온 인간 이성은 교만해요. 다른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 지배를 바탕으로 문명을 세운 거죠.” 그래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질가치에 모든 것을 걸고 ‘복잡 미묘하고 다양한 생태적 관계와 정교한 생태 그물망’을 한순간에 불도저로 밀어버리고도 어떤 일을 벌인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지금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한순간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섣부른 파멸의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악순환되는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함께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무한하고 광활한 자원을 정복하는 카우보이 경제에서 인류는 벗어나야 해요. ‘우주선 지구호’의 자원은 유한해요. ‘무한한 성장’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안은 없어요.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그저 좋은 말이 아닌 거예요.”

노융희 님은 거대주의에 중독되어 빠르고, 길고, 크고, 넓고, 넓은 것이 아니면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문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연의 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능력, 모든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고 듣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아> 창간사에서 밝혔듯이, 지구에는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어울립니다. 작고 가벼움, 그리고 부드러움은 생명과 기쁨의 상징이요, 크고 무거움, 그리고 딱딱함은 죽음과 절망의 표식입니다. 크고 무겁고 딱딱한 것은 더 빨리 사멸되고야 맙니다.”

인생의 뒤안길, 구름과 물이 거침없이 흐르듯 살아온 시간이 고맙고, 이어온 인연들이 고맙다. 40년 넘은 집이 용산 재개발로 사라지지만, 지나온 삶이 그러하듯 다 사라진 것은 아닌, 소박하고 뜨겁게 다시 시작했던 마음들이 기억될 것이다.

작은것이아름답다 2010년 3월호 – 작아가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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