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에세이」 산을 좋아하는 변호사로 살다보니

2019.01.21 | 행사/교육/공지

변호사들이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오색케이블카 반대 원고인단을 모집하는 모습(제일 왼쪽이 최재홍 변호사)

 

산이 좋아 산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산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에 와서는 산 관련 잡지를 보고 산을 공부하고, 산에 자주 올랐다. 1993년 겨울, 치악산에서 만난 형님의 조언이 지금의 삶을 결정하게 될 줄이야. ‘산이 좋아 산을 위해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동생이 법대라고 하니 산 밑에서 산을 위해서 일하다 보면 언젠가 산이 동생 옆에 있을 거다’ 라는 조언으로 말이다. 산에 자주 다니다보니 개발에 의해서 산이 파괴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산이 좋아 변호사가 되었다.

분쟁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주고,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며, 사회적 지탄을 떠나 법적인 책임만을 부담하도록 해주는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변호사라 한다. 변호사는 업무 특성상 다양한 직업군과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변호사에겐 분쟁이 일상이고, 많은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지만, 사건을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평생 1번 있을 분쟁을 자신의 일처럼 처리해주는 변호사를 원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의 마음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픔에 대해 변호사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분쟁의 사실관계 전체를 장악해야 하며, 의뢰인의 억울함을 법률적 언어로 판사에게 주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변호사는 사건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도록 객관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법정에서는 의뢰인과 함께 분노하고 울분을 토해야 한다.

안성에 모 골프장 사건도 그랬었다. 학교, 도로, 병원같은 공공시설이 아닌 골프장을 지어야 한다며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땅을 강제로 수용한다면 어떨까. 골프장을 사업을 하는자의 이익을 위해 말이다. 주민들과 마을회관에서 미팅을 한 후 서울로 돌아오면서 난감했다. 이미 행정처분은 완료되었고, 공사가 시작된 상황이다. 소송을 하더라도 공사를 중단시킬 수는 없으며, 수용보상금마저 공탁되었기에 철거와 명도소송도 조만간 진행될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소송뿐이었다. 주민들과 함께 안성시청 앞에서 집회를 하고 시장에게 골프장 처분을 직권으로 취소해달라는 신청을 한 후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패소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집이 철거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할머니의 눈물어린 목소리를 핸드폰으로 듣고 있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날 저녁 혼자 마을 입구까지 운전해 가서 철거 된 현장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거기에 있었어야 할 할머니의 집은 없었고, 할머니를 만나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되나 생각했지만 차마 연락을 하지 못했다. 당신의 변호사가 더 이상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그리고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기까지 걸린 4년의 시간. 마을주민들은 5년 동안 골프장과 안성시와의 싸움에 많이 지쳐있었고,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억지를 쓴다는 사회적 편견에 마음아파 했었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2주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가서 자료를 수집하고, 주민들과 함께 안성시청에서 집회를 하였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공개변론기일에 대심판정 대리인석에서 변호사가 된 이후 첫 법정에 섰던 것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해간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심판정의 전자시계 10분은 왜 그리 빠르던지.

골프장 사업은 결코 헌법 제23조 제3항의 공공필요성이 인정될 수 없는 사업이라는 것을, 골프장 때문에 토지를 수용당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지치고 모두가 포기했던 시간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었었기에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을에서는 이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잔치를 하였다. 물론 철거된 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함께 해서 만들어낸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

황혼이혼 사건도 그랬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이었고, 어머니는 웨딩샵을 운영하며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족경제를 책임져 왔다. 아버지의 폭언에 따른 피해를 줄이고 금주를 위해 어머니와 장남은 아버지를 알콜중독 치료센터에 입원시켰고 문제는 발생되었다. 아버지가 센터를 임의로 퇴원한 후 아내와 장남을 감금죄로 형사고소하고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상담을 해보니 아버지는 알콜중독으로 간경화가 심화된 상태였고, 복수가 차올라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형사 고소와 이혼소송 제기는 적반하장이라고 흥분했으나, 오히려 어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왔고 미우나 고우나 남편인데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배우자로서 인연을 놓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사건을 선임한 후 재판부에 전화를 해 상황 설명을 하고, 원고인 남편분과 협의를 진행하고자 하니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첫 재판 때 판사는 자신의 아버지도 알콜중독이었다는 본인의 가족사를 언급하며 피고 대리인이 협의를 한다고 하니 잘 상의해보라는 말과 함께 재판을 추정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집에서 가출(?)을 해 근처에 있는 원룸에 혼자 있었다. 그 재판 이후 매주 1차례 자녀들과 손주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원룸을 찾아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했다. 가족이 아닌 변호사가 중간에 가교 역할을 하니 아버지는 거부하지는 않았고, 막걸리를 함께 나눠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아버지는 이제 막걸리를 하루에 2병만 마시기로 하고, 손주들에게 떳떳한 할아버지가 되기로 약속하며, 이혼소송을 취하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초대 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 한마디 “고맙습니다.”

서로 간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감정으로 인해 평행선을 달릴 때 특히 가족 간의 분쟁은 이를 조정해주는 제3자가 필요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 변호사로서 여러 가지 문제를 접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그 법을 개선해서 동일한 피해자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송을 위해서는 입증할 증거를 찾고, 설득력 있는 변론을 위해 준비하지만 문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사람의 상황에서 공감하고, 헤아려주는 것이 때로는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12년의 변호사 생활을 하며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었던 사건들은 소송결과를 떠나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들과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최재홍

최재홍 님은 대학시절부터 녹색연합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인연을 맺은 오랜 회원이다. 전국을 뒤엎은 골프장 문제를 꼼꼼하게 파고들어 골프장의 토지강제수용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 낸 최재홍변호사는 골프장 업계의 저승사자로 불리우기도 하다. 최재홍 변호사는 4대강사업 국민소송, 밀양 송전탑 공사중지 가처분, 국립공원 계획변경처분취소소송(설악산 케이블카 취소)등의 공익소송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자연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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