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이름 불러주기

2004.05.10 | 백두대간

아래 사진은 얼마 전 금오산에 갔을 때 찍은 제비꽃들입니다. 다음에 이 꽃들을 다시 만나면 이름이라도 불러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와서 식물도감을 펼쳐보았습니다. 헌데 식물도감에 나와있는 제비꽃은 그 종류만도 수십가지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꽃이 그 꽃 같은데 모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도저히 제가 찍어온 사진만으로는 무슨 제비꽃인지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작 흰색 제비꽃, 분홍색 제비꽃 정도였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은 분이 꽃만 봐서는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잎을 봐야 무슨 꽃인지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꽃만 보고선 이름을 불러줄 수 없고, 잎을 봐야 비로소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다고.





금요일 해질녁에, ‘백두대간’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밝힌 산경표를 한글 번역하신 현진상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먼저 선생님은 한문 산경표와 한글 산경표를 펼쳐 보이시면서 ‘산경표는 족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족보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족보는 네 줄에서 다섯 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줄에는 1대 자손의 형제, 자매들이, 다음 줄에는 2대 자손의 형제, 자매들이, 그 다음 줄에는 3대, 4대 식으로 말이지요. 또 각줄의 맨 오른쪽에는 장손이, 그 왼쪽에는 차손들이 옆쪽으로 차례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산경표도 이와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조인 백두산, 그 밑으로 장백산, 그 밑으로 금강산, 그 밑으로 태백산, 그리고 맨 마지막엔 지리산이 종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백산, 태백산 같은 경우는 그 산에서 분기하는 정간과 정맥이 형제, 자매처럼 횡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대간’은 장손들의 모음이고 1정간과 13정맥은 각 장손들의 형제 자매인 셈입니다. 현진상 선생님은 산경표가 족보와 완벽하게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족보에서 장남만 의미 있냐고 우리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족보가 장남을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족보를 펼치면 맨 오른쪽에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 장손의 장손들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듯 산경표의 장손들 즉 ‘대간’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족보가 온 집안 사람들의 기록이듯 산경표도 ‘대간’만이 아니라 1정간, 13정맥 모두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백두대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면, 대동여지도에 뚜렷이 산줄기로 묘사된 김포 지역은 실상 평야지대입니다. 그곳에는 동산 비슷한 것도 없어 보입니다. 또 대간의 한 허리를 차고 있는 추풍령은 해발고도가 200m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주위의 산들과 비교하면 산이 아니라 계곡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백두대간 종주가 어려웠던 까닭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의당 높고 험준한 능선의 연속선이라고 여겨지던 백두대간 중 일부분은 그저 동산이나 야산정도의 야트막한 지대였습니다. 그런데도 현진상 선생님은 ‘백두대간은 나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을 뿌리로 해서 ‘대간’이라는 큰 줄기, 1정간과 13정맥의 작은 줄기 그리고 그곳에 옴살궃게 붙어있는 대지가 잎이 되는 하나의 거대한 나무라고 합니다.

백두대간은 땅모양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닮았다는 유사성을 넘어선 하나의 지리관이기 때문입니다. 백두대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실제 몇몇 곳은 가지가 부러지거나 가지라고 보기 어려운 곳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대동의 관점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낸 세계관이자 철학이라 이름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궤적은 ‘선(線)’입니다. 설악산에 갔다왔다는 것은 실상 설악산 등산로를 갔다왔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이번 백두대간 녹색순례 때도 우리는 선적으로 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족보에서 장손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족과 집안 모두가 소중하고, 사소한 끊김과 막힘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하듯, 이번 순례는 ‘선’이 아닌 ‘면과 공간’으로 백두대간에 다가설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저 이름이라도 불러주기 위해선 곱고 화려해서 눈에 잘 띠는 꽃만이 아닌 사철 발벗은 아낙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잎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글 : 자원활동가 손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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