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첫 번째 이야기]전라도의 산줄기를 생명의 발걸음으로

2005.01.01 | 백두대간

무령공재 – 수분재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이 만나는 장안산 아래에서 출정전야를 맞이했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화산마을의 밤이었다. 장수군의 지역주민들과 광주, 서울에서 모인 탐사대의 설레는 분위기로 깊은 밤의 고요를 장날의 시끌벅적함으로 바꿔놓았다.


드. 디. 어 호남정맥 환경실태조사의 첫 날.
잔뜩 서늘한 날씨지만 첫날의 설렘으로 볼을 파고드는 새벽공기의 칼날 같은 차가움은 오히려 시원함으로 느껴진다. 무령공재로 가는 길이다. 화산마을에서 장안리 회평마을 쪽으로 가면 새로 뚫린 터널을 지나 무령공재로 간다. 운전하던 지역주민조차 모르던 새로운 터널이다. 논개사당과 논개생가를 잇기 위한 관광도로라고 한다. 도로를 내는 것만으로 관광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나 단 몇 분의 시간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탐사대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깡총, 깡총 시속 60km로 달리는 자동차 앞으로 멧토끼 한 마리가 뛰어든다. ‘야생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프랑을 걸고 발대식을 했던 그곳으로 가는 길. 저 작은 멧토끼에게는 우리도 위협의 대상일 뿐이겠지만, 그의 출현이 탐사대의 첫날을 반기는 것 같아 기쁘다. 아직 이 땅에 살아있다고 알려오는 것 같은 안도감이 첫날의 희망으로 전해온다.  

호남정맥의 출발은 무령공재부터다. 이 고개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300m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장수군 계남면과 번암면의 경계다. 현재 번암면과 장계면을 잇는 도로 확·포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문 닫은 매점과 쉼터, 화장실, 넓은 주차장을 지나 장안산으로 향한다.

장안산 정상(1237m)을 1.5km쯤 앞에 두고 주변 산들을 둘러보았다. 왼편에 보이는 백운산을 중심에 두고 십자 모양으로 괘관산, 장안산, 지리산, 남덕유봉(동, 서, 남, 북 순)이 이어진다. 괘관산은 일제 때 빨치산이 은거했던 역사적인 곳이라고 한다. 힘겨웠던 세월을 산은 말없이 품고 있었다.  
앞쪽 멀리 구름 위로 솟아있는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의 모습이 아련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천왕봉의 정상 근처에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고 간 듯한 생채기가 보인다. 보통의 스키 슬로프보다 훨씬 큰 규모를 가진 산사태의 흔적이다. 누군가 더 거칠고 신나는 스키를 타려면 천왕봉으로 가야겠다는 농담을 던지지만 아무도 웃을 수는 없었다.


장안산은 장수군 계남면과 장수읍 번암면의 경계를 이루고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장안산이라고 쓰인 표지석과 헬리포트, 삼각점, 범연동/무령고개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거느린다. 올라왔던 길이 가팔랐던지라 모두들 쉬며 간식을 꺼내먹는다. 헬리포트의 우주적인 문양을 보며 “가운데를 누르면 누군가 나온다는데~” 그가 메칸더인지 태권브이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호남정맥의 입체적인 실태파악을 위해 장안산 정상에서부터는 세 팀으로 나누어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호남정맥의 주능선을 따라 수분재까지 가는 능선팀, 장수읍과 번암면의 경계를 따라 용림댐의 실태를 파악하는 댐조사팀, 번암면 사암리의 방화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야생동물팀이다.

장안산 정상에서 4km지점의 주능선에서 쓰러진 나무들을 만났다. 950봉 근처다. 장수읍이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약 150제곱미터에 걸쳐 수 백 그루가 벌목 된 곳을 지난다.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같은 참나무류가 대부분이다. 나이테를 세어 보니 29년부터  31년, 34년, 39년 등 꽤 수령이 높은 나무들을 많이 베어놓았다. 누가 무엇 때문에 베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마음을 잘려나간 밑둥에 대못으로 붙박아 놓는 것 같았다. 장수읍 덕산리에 위치한 밀목치에는 남쪽 용림댐을 건설하면서 생겨난 수몰민 이주마을이 있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이어지는 길 따라 나있는 폭 2m의 임도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주차장으로 이어져있다. 활공장 정상에는 붉은 깃발이 흔들리고 녹슨 쇳조각, 맥주병, 담뱃갑 등이 버려져있다. 전체적으로 3개의 날개를 가진 부메랑 같은 모양으로 나무를 베고 잔디를 심어놓았다. 어이없는 현장이다. 호남의 정기가 뻗어가는 생태축이 알량한 레져놀음을 위해 무참히 파헤친 현장이다. 장수군청이 한 것으로 보였다.


바구니봉재 남쪽 골짜기 아래서 한참 도로공사 중이다. 번암면 쪽 골짜기 안에서 포크레인의 굉음이 포성처럼 이어진다. 공사소음이 능선까지 들려온다. 수분리쪽은 임도가 있는 오른쪽 사면에 대규모 벌목이 되어있다. 나이가 30년 전후 되는 나무가 수백그루 널부러져 있다. 당재에서 수분재 쪽 언덕도 전부 벌채가 되어있다. 산을 무참히 깎아 내는 공사가 한창이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번암면 사암리 일원에서 이루어지는 ‘장수 관광순환도로’ 공사이다. 공사 개요 중에는 수분리와 사암리 사이의 터널건설도 포함되어 있다. 고개에서 수분리쪽으로 이어진 비포장길을 따라 내려오며 허옇게 깎여 내린 산의 허리를 구석구석 지켜본다.

하루 종일 호남정맥의 산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보았던 많은 일이 자연에게는 물론 사람에게도 아픔으로 남을 상처 자국 투성이였다. 산은 이미 너무 많은 곳을 잘리고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몇 분의 시간을 단축하는 것보다 작은 생명하나 하나를 더욱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의 마음, 그 어려운 틈에서 호남정맥의 아픔을 정직하게 듣고 마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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