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이야기의 ‘대안’을 위하여

2004.12.29 | 백두대간

박 영신 / 녹색연합 상임대표.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아래 글은  [환경과생명] 2004년 겨울호에 실린 한면희 지음, 「초록문명론」의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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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평해 주면 좋겠다는 편집실의 부탁을 받았지만 엇갈리는 생각에 얼마간 대답하지 못하였다. 생태주의에 관심을 두어왔던 한 사회학도로서 젊은 철학도가 펼치고자 하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해 곧바로 읽고싶으면서도, 이런저런 일로 몹시 바쁘게 지낼 때라 정중히 거절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이지만 망설인 다음에야 서평에 응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내 자신 이 책을 읽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이 책을 받았다. 350쪽이나 되었다. 나는 꽤 긴 시간을 바쳐 한자 빼놓지 않고 이 책을 다 읽었다. 녹색/초록 문명을 이야기한다면 뜻 있는 사람들이 밤을 지새우면서라도 함께 생각을 나눠야 하고 또 나누지 않겠는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초록이라는 대안 문명을 주제로 삼고 있다. 아득한 역사로부터 산업 문명에 이른 과정과 이 문명에서 비롯되어 나온 환경의 위기,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제를 이른바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산업 문명이 낳은 환경 문제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 환경 운동의 흐름도 훑어보고 대안 문명론과 환경 정의의 문제를 알아본 다음, 대안 문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땅히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하기에 이를 교육의 문제와도 이어보고자 한다.

모든 책이 다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읽는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로 다가온다. 이런저런 것을 두루 배우며 성찰의 계기도 얻는다. 기대했던 대로 나도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생각했다. 낯선 것을 접하게 되면 이해하려 애쓰고 익숙한 것을 대하면 되새김질해보려고도 했다.

지은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참고문헌에 싣고 있는 글들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산업 문명을 만든 쪽도 서양이고 초록 문명을 소리치기 시작한 쪽도 서양이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서양의 생각을 마주하고 그 생각과 대화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연구 업적을 끌어들이고 서양의 사례에서 보기도 끌어들인다. 초록 문명을 두고 여기 저기서 글을 써 왔다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만나 그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땅에서 산업 문명의 파괴성에 가슴 아파하며 대안 문명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과 만나, 그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어두운 절망의 계곡을 벗어나 저 푸른 들판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과 함께 가슴 치고 그들과도 함께 소리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의 생각은 정서의 공감을 자아낸다. 대안 문명을 논하고 초록 문명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리를 내는 한 우리는 귀 막고 피해갈 수 없다. 그 소리에 귀 기울어야 하고 그 외침에 손짓하며 화답해야 하기에 그렇다.

가장 잘 읽히는 부분은 환경 운동의 역사를 훑어보고, 초록 문명의 대안을 내놓고자 하는 심층 생태주의와 사회 생태주의, 그리고 생태 여성주의를 다루고, 환경 정의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내용이다. ‘입문서’처럼 평이하다. 지은이가 적어두고 있는 참고문헌도 많은 경우 일차 자료이기보다는 이차 자료다. 편안히 읽었지만 지은이 자신의 생생한 생각이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환경 담론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앞부분을 뛰어넘어 곧장 11장과 12장으로 가도 좋을법하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은이 자신의 생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과 어울리고 그의 생각과 부딪히고 그의 생각에 잠겨 들 수 있는 부분이다.

지은이는 몇 해 전에 내놓은 바 있는 ‘기생태주의’를 이 지점에서 다시 끌어들인다. 자연 생태계에 스며들어 있는 생명 에너지를 ‘생태의 기’로 이해한다. 그 ‘기’가 흐르는 삶의 터전이 자연이다. 모든 생물종은 저마다 기를 받고 기를 내며 산다. 인간 또한 기가 흐르는 그 테두리 안에서 문화를 만들며 산다. 기생태주의는 이러한 ‘기’의 생명력으로 생명체들이 서로 뗄 수 없게 이어져 함께 도우며 서로 기대는 가치 이념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초록 문명’은 바로 여기에 바탕하고 있다.

대안의 삶은 생명체들 사이에서 생명의 기가 다툼과 맞부딪침 없이 부드럽게 흐르게 되는 삶의 터전, 거기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부추기고 뒷받침하며, 서로 공평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생명 살이 문화’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으쓱거릴 수 있는 논지가 펼쳐진다. 이러한 대안의 초록 문화가 “우리 한반도에서 조성되었다”고 하고는, 한의학은 물론 풍수학과 백두대간의 의식 세계가 기생태학에 들어맞는다 한다. 읽는 이들은 솔깃할 것이다. 백두대간에 남다른 마음을 지켜오고 있는 녹색연합 사람으로서 나 또한 상기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대목이다.

언뜻 보면 지은이가 국수주의의 성향을 띤 논객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오늘의 산업 문화가 저지른 끔찍한 생태계 파괴를 돌파하여 대안을 찾아 나선다면 그 곳은 산업 문명을 낳은 서양이 아니라 ‘비서양’ 어디쯤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듯하고, 실제로 초록 문명에 들어맞는 것으로 한의학과 풍수학과 함께 우리 고유의 ‘백두대간 문화’를 높이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렇게 좁다랗지 않다. 우리의 것들이 초록 문명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모든 대답을 찾고 거기에서 모든 방도를 얻어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의 역사 전통 속에 눈을 돌려 ‘회복의 가능성’을 내세우면서도 그는 생태주의의 지평에 떠오른 수많은 개념과 주장들에 대하여 대화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록 문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느 것이든 자원으로 활용한다. 생태 의식을 바꾸기 위해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면 거기에 적합한 교육의 철학과 방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서양 것이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동양 것이어야 한다는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는 개체론에 맞서는 전체론의 시각에 서있는 캐나다의 한 교육자의 생각으로까지 나아간다. 그것이 초록 문명의 생태주의에 적합한 교육 이론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도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나는 생태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터라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더욱 분명하게 전체론을 앞에 내세울 것이다. 개체로부터 출발하는 자유주의와 거기에 터한 환경 정의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 지금껏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를 공동체주의와 대립시켜온 논쟁의 틀에서 벗어나, 생태계로 뻗쳐나가는 공동체주의 곧, 생태 공동체주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풀이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녹색/초록 문명론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초록 문명론은 ‘개체’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때로 혼란스럽다. 특히 환경 정의를 다루고 있는 부분과 마지막 장에 들어있는 ‘홀리스틱 교육’을 잇고자 할 때 부딪히게 되는 혼란이다. 지은이 스스로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환경 정의’는 다분히 개체주의(또는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환경 정의’라는 말 대신에 ‘생태 정의’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내면의 압력을 받고 긴장하곤 한다. 이 논의의 줄기에서 드러나는 혼란은 개체성과 전체성 사이에서 지은이의 생각이 엇갈리고 있음을 일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혼란은 마침내 책의 끝머리에 나오는 ‘홀리스틱 교육’의 전체성 안에 들면서 잦아들고 만다. 지은이가 아직도 개체성과 전체성 사이에서 명쾌한 입장 정리를 하지 않은 채 ‘홀리시틱 교육’으로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발표했던 논문을 싣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장에 담은 그의 생각을 정리된 결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초록 문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위대한 문화 전통과 종교에 문을 열어두고 그 위대한 자원에서 배우고자 한다. 때로 그 일그러지기 이전의 전통을 회복코자 하고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활용코자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배타성의 길을 걷지 않는다. 차라리 개방성의 길을 걷는다. 위대한 문화와 종교의 전통을 등에 지고 저 생태 위기의 난간 앞 자투리땅에 나와, 서로 등에 지고 온 보따리를 풀고 위기를 넘어설 자원을 서로 나누고자 한다. 생태의 위기 앞에 지켜야 할 교조성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위기 앞에 벗어 던지지 못할 독선은 하나도 없다. 함께 만나기 이전의 ‘큰 진리’는 함께 만난 이후 ‘작은 진리’로 낮아진다. 이들 작은 진리가 새로운 큰 진리를 위해 자체의 담벼락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대안이란 잠깐 동안의 대안일 뿐이다. 영원한 대안이란 현실 세계에는 없다. 그 너머에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대안을 찾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은 모름지기 대안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야 하는 부단한 대안 넘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초록 문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이러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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