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아니 또 빠르게? – 걷는 길 여행 열풍에 찬물 끼얹는 케이블카 건설 논란

2010.10.14 | 설악산

걷는 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외국에선 숲과 마을을 연결하는 ‘트레일’을 따라 걷는 ‘트래킹’이 일반적인 여행 방식이라 다양한 유형의 트레일이 개발되어 있다. 성직자들의 순례길을 따라 걷는 스페인의 산티아고가 있고, 용감하고 무모하기도 했던 개척시절의 탐험가 몇이 만든 미국의 에팔래치아 트레일도 있다. 네팔이나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선 히말라야의 봉우리를 등정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야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봉우리를 바라보며 히말라야 산자락을 둘러보는 여러 트레일이 있어 잠시 그 맛을 느껴볼 수도 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여행문화가 가능할까 했던 기우는 최근 불고 있는 이 ‘걷는 길’ 열풍을 보며 정말 기우였음을 느낀다. 알려지기론 제주도 올레길이 크게 유행하면서 전국 곳곳에 걷는 길 열풍이 분다고 하지만, 이런 흐름은 올레길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많은 도보답사여행모임들이 전국의 알려지지 않은 옛길을 찾아 다닌지는 오래전부터다. 올레길과 더불어 대표적인 걷는 길인 지리산 둘레길도 지리산 정상 종주 위주의 산행문화를 벗어나 지리산의 자연뿐만 아니라 마을과 문화, 사람을 함께 보고 정상에 몰리는 인원을 분산시켜 지리산의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이미 수년 전부터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 관련 기관들이 함께 준비해온 결과다. 울진의 왕피천 자연생태계보전지역을 보호하고 지역의 관광개발 욕구도 함께 충족하기 위해 올해부터 개방된 울진 금강소나무숲길도 생태계보전지역이 지정된 해부터 몇 년간 공들여 진행해온 일이다.

걷는 길이 유행한다고 하니, 지자체들도 앞 다투어 걷는 길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원래부터 있던 길에 이정표를 세우고 사이사이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곳들을 안내해주는 일 정도에 족해야 하는데, 길을 더 넓히거나 숲을 가로질러 없던 길을 일부러 내고, 온갖 편의시설을 갖추면서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도 대규모 위락시설을 유치하고 무슨 무슨 타운을 건설하는 게 관광지 개발의 전부인 줄 알았던 과거를 비교해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주도의 이름 화려했던 관광지들은 저물고 그저 사람들 살고 소박한 자연이 있던 곳들이 올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각광받는 건 정말 획기적인 변화다.

앞으로의 여행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의견이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전국 일일권이라 하지만, 여행만큼은 당일치기로 콩 볶아먹듯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 몸을 움직이는 수고를 할 때 정말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때서야 비로소 여행이 여행다워진다는 것을 경험해본 이들은 모두 아는 것이다. 슬로우 시티, 슬로우 푸드, 공정여행, 착한여행, 체험여행, 캠핑 같은 것들이 유행하는 것도 다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이런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게 유행이 되고 있는 이 때에 순식간에 정상까지 올려주는 ‘케이블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진 이유는 정상에만 모이는 사람들을 분산시켜 지리산도 지키고 새로운 여행문화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지리산에 사람들을 더 많이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가 들어설 거라고 한다. 지금도 시즌만 되면 줄을 서서 올라가야 하는 설악산에도, 시즌과 관계없이 일년내내 사람들이 바글대는 북한산에도 케이블카 설치 움직임이 있다.

추석 바로 전날엔 환경부가 발의한 국립공원 안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도록 허가해 주는 자연공원법 시행령이 전격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대로라면 설악산 대청봉에 5층 높이의 케이블카 정류장이 생길 수 있게 된다. 국립공원에서 케이블카 건설이 손쉬워질 전망이니 지방의 도립공원이나 다른 관광지에서도 너나없이 케이블카 계획들이 발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유전자보호림이 있고, 민통선 지역이기도 한 화천의 백운산 일대에도 케이블카 논란이 있는데, 이곳은 연중 안개일수가 높아 실제 운행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도 않고 산사태 위험지역임에도 환경부에선 사전환경성검토를 승인해 주었다.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해마다 그 길을 걷기 위해 여행자들이 찾고 있는 문경새재에도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겠다며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40여분의 걷는 길을 단 몇 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케이블카로 사람들이 더 몰릴지, 오히려 길을 찾던 사람들이 문경새재를 외면하게 될지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걸으면서 자신과 이웃, 자연을 다시 돌아보는 여행이 확산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케이블카 논란. 그런데 이 논란을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 바로 우리의 산천을 지켜야 할 소임을 갖고 있는 환경부라고 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글 : 정명희 (녹색연합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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