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과 차윤정 교수

2010.05.13 | 4대강

환경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 레이첼 카슨.
그녀는 타임지가 뽑은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중의 한명이기도 하고, 우리에겐 ‘침묵의 봄’의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침묵의 봄은 1970년대 무분별한 살충제 남용으로 죽어가는 자연생태계에 대한 경고를 담은 글이다. 화학물질의 남용이 인류와 자연에 끼칠 끔찍한 재앙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 책은 지금까지도 환경생태 분야의 고전으로 일컫는 책이다. 화학산업은 농약 뿐만 아니라 가정용 살충제, 화학무기 개발 등 당신의 신산업으로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유발하는 산업이었으므로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을 발간한 이후 산업계, 정부, 일부 언론으로부터 끊임없이 협박과 경고에 시달려야 했다. 침묵의 봄을 발간하기 이전까지 레이첼 카슨은 생태계에 관한 과학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책을 내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침묵의 봄 이후, 그녀는 원하든 원치 않았든 환경운동계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고 그녀의 삶이 침묵의 봄 이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갈나무 투쟁기』, 『숲의 생활사』, 『나무의 죽음』등 숲과 나무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쓴 ‘차윤정’ 교수의 책을 읽으며 나는 종종 레이첼카슨을 떠올렸었다. 레이첼카슨이 침묵의 봄 이전까지, 생태계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펴내며 사람들에게 자연을 그저 정복이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을 경이로움, 신비로움의 공간, 열정적인 생명과 죽음이 조화롭게 공존하는곳 등으로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차윤정 교수도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차윤정 교수가 쓴 책들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그녀의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숲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숲의 중요성을 깨닫고 숲을 보호하기 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여러 자리에선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 숲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고백을 많이 들어왔었다. 비록 그녀가 직접 환경운동에 어떤 목소리를 낸 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책과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늘 그녀에게 마음 속 깊이 고마움과 존경을 갖고 있었다.

5월 11일, 국토해양부에서 차윤정 교수를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 환경 부본부장 겸 홍보실장으로 채용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레이첼 카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이, 4대강 사업의 전도사로 나설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더 이상 그녀의 책과 글을 전처럼 마음 속 깊이 감동하며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레이첼 카슨이 비록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협박을 받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과 후세대에까지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이 된 것과 반대로, 이제 차윤정 교수는 정부와 일부 기업에겐 사랑받지만, 숲에 대한 그의 글을 읽으며 감동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더이상의 애정을 기대하긴 힘들게 되었다.

이 정부 들어서 나는 환경부의 공무원이, 환경 전문가로 알고 있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환경을 파괴하는 일에 나서며 지금까지의 말과 상식을 부정하는 걸 보아 왔다. 그 명단에 한 사람, 내가 존경했던 한 사람을 또 추가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을 홍보하는 일을 맡았으니 조만간 그녀의 유려한 필력으로 4대강 사업을 찬양하는 글이 등장할텐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자신의 결정이 학자적 양심과 지식을 위반한 것이 아님을 밝힐텐데, 그 근거가 뭔지 궁금하기만 하다.

‘인간의 기술은 자연을 극복함과 동시에 자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진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장수하늘소가 살려면 안정적인 숲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이가, ‘숲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말하며 자연 생태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드러내던 그가, 하루아침에 지금 이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처참한 자연 학살인 4대강 사업을 홍보하는 일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강은 숲과 달리 다양성도, 안정성도 중요하지 않거나 강변의 나무들은 숲 속의 나무들과는 다르다거나, 강에 깃대어 사는 생물들은 숲 속의 생물들과 달리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 걸까, 아니면 어떤 정치적인 압력이, 경제적인 압력이 그녀가 누누이 말해왔던 것을 뒤엎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게 한 걸까?

“경인년 새해, 이 땅 어디인가에 있을 호랑이와 살아남은 멧돼지와 야생의 자연에서 위태한 생을 이어가야 할 뭇 생명들에게 평안함을 기원한다.”

올 초 차윤정 교수가 한 신문에 남긴 새해인사다. 하루하루 베어지고 있는 남한강 강변의 숲에서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수리부엉이의 눈이 자꾸만 떠오른다.

글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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