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핵아시아포럼 참가기2> 후쿠시마현민 집회에 가다

2011.08.07 | 탈핵

일본에서 두번째 날의 여정. 이번 일본일정 중 가장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는 날이다. 후쿠시마 현지에 가는 날.

어제 후쿠시마 현민 보고대회에서 후쿠시마 시내 방사능 오염도가 높다는 얘기를 강조해 들었던 터라 더 걱정되기도 했다. 도쿄에서 신간센으로 1시간 반을 달려 후쿠시마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하니 ‘파이팅! 후쿠시마’라고 적힌 입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입간판엔 여행객들의 응원메시지가 가득하다. 역사를 나오는데 일행중에 방사능 계측기를 가진 이가 있어 실시간으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역광장에 나가니 123nsv, 0.12마이크로시버트다.

방사능계측기에 함께 참가한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들 관심이 집중되었다. 모든 카메라가 순식간에 변해가는 방사능 수치를 촬영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긴장감과는 다르게 후쿠시마 시내는 평온해 보일만큼 조용했다. 역광장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젊은이들의 노래공연이 이어지고 있었고 역광장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서 있었다. 비 탓인지 오가는 행인도 적었지만 거리를 오가는 후쿠시마 현민들의 표정은 그저 인구적은 소도시처럼 평안해보였다. 거리에는 세일을 알리는 광고판만 눈에 띌 뿐 핵사고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광고물이나 사람들을 선동하는 작은 벽보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5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그곳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그저 일상일수도 있겠다.
 


오늘은 후쿠시마 현민 집회가 있는 날이다. 길을 건너자 집회를 안내하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집회가 있을 때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서명을 받고 유인물을 배포하며 집회를 알리고 있었다. 한 블럭을 걸어 도착한 집회 장소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참가단체별로, 동네별로 현수막과 만장, 온갖 구호가 적인 깃발을 들고 작은 광장을 사람들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구호가 적인 모자를 쓴 할머니도 몇분 눈에 띄고, 어떤 참가자들은 아이의 사진을 넣어 후쿠시마 아이들을 지켜달라는 구호가 적힌 부채를 들고 있었다. 광장 바닥엔 동네이름이 적힌 흰 종이가 젖지 않도록 비닐에 쌓여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란 조끼를 입은 아저씨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흰 종이를 기준으로 서 있었다. 사회자는 약 2,700여명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문화공연을 시작으로 후쿠시마 현민 집회가 시작되었다.

NHK를 비롯한 방송국, 신문, 외신기자들이 이 집회를 열심히 취재했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도 자국에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1부 문화공연이 끝나고 이어진 집회에서는 각계의 발언이 이어졌다. 가족과 함께 피난한 공무원, 20대의 젊은 교사, 중학생딸을 둔 엄마와 같은 지역주민들과 고향을 잃고 피난생활을 하는 피난민등 발언자들은 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제대로 된 안전대책을 세워줄 것과 후쿠시마부터 핵없는 깨끗하고 안전한 지역을 만들 것을 집회 참가자들에게 호소했다.

우리들은 한국의 상황이 적힌 일본어 유인물을 배포하고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은 플랭카드도 펼쳤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가운데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 비는 후쿠시마의 비다. 방사능이 흠뻑 포함되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날 대기중 방사능이 비에 씻겨 지상의 방사능 농도가 몇배나 높아졌다는 얘기를 지난 4월 방한한 반 히데유키씨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다만 대여섯 시간을 여기 후쿠시마에 있을 뿐이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지난 5개월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평생을 여기서 살아야 한다.

행진은 약 30분간 후쿠시마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났다. 마을별로 플랭카드를 들고 질서있게 진행되었다. 집회안내자가 구호를 제창하고, 사람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후쿠시마 아이들을 지키자.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를 만들자 라는 것이 주된 구호였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집회에 참가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아이도 부모도 흰 마스크를 쓰고 손으로 쓴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서 있었다. 방학을 맞아 많은 후쿠시마 아이들이 일시적으로 연고를 찾아 피난을 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비가 오니 밖에 나오지 않아 인구 200만의 도시 후쿠시마에서 내가 만난 어린 아이는 그 아이가 유일했다. 어제 후쿠시마 현민 설명회에서 아이들을 방사능으로 부터 지키는 후쿠시마네트워크의 대표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학교급식센터에서 사고가 난 직후 원산지를 묻는 질문에 후쿠시마산이 아닙니다 라고 답하던 것이 요즘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했다. 사고 후 후쿠시마 산 신선식품이 동네 수퍼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요즘 들어 다시 슬그머니 판매가 되고 있다 한다. 후쿠시마를 돕자는 움직임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유통되고는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고 있어 후쿠시마에서 싼값에 학교급식에서 사용되거나 가난한 소비자에게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팔리니까 상점에선 진열하는 거겠지. 같은 지역에서 사는 이웃주민이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피난하거나 방사능 오염이 덜한 관서지방에서 온 식품을 소비하며 피폭량을 줄이기 위해 자구책을 찾고 있는데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피난할 수도, 안전한 식품을 찾아 소비할 수도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었다.

집회에 참석한, 어린아이가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후쿠시마를 만들자고 호소하는 이 젊은 부부도 아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피난할 수 없었으니 그 타는 속이 어땠으랴. 그 애끓는 마음이 그들이 들고 있는 손피켓에서 느껴졌다.

행진을 하는 동안 10대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장난치는 그 어린 학생들은 앞으로 닥치게 될 그들의 어려운 미래를 짐작하고 있을까?
그 어린 학생들은 후쿠시마에서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어마어마한 사고의 뒷수습으로 평생을 지내야할지 모른다. 사고가 난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10년이상 계속 지금처럼 냉각하며 냉각수를 처리해야 하고 그동안 방사능 누출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폐로에 20~30년이 걸린다 하니 저 어린 학생들이 후쿠시마 사고 수습이 끝나는 때에는 40대 중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어느곳에 살던 후쿠시마 출신이라는 딱지와 어마어마한 수습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도 이 후쿠시마가 인구 200만의 도시로 남아있게 될까? 아마도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도시가 되지는 않을까? 한국의 아이들과 똑같은, 자전거를 탄 아이들의 맑은 표정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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