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단’의혹사건 관련 시민단체 입장 발표

2006.11.10 | 군기지

‘간첩단’ 의혹사건 공표 및 보도 과정에서 일어난

공안기관과 언론의 중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에 대해 엄중 항의한다.

지난 10여일간 공안당국과 보수 언론들은 소위 ‘간첩단 사건’을 제기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해왔다. 우리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간첩단 사건’의 실체가 하루 속히 규명되기를 기기대하며 상황을 지켜봐왔다. 그러나 ‘간첩단사건’이라고 언론에 무책임하게 유포한 공안당국은 지금껏 사건의 실체를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보수 언론과 지식인, 정치권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권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진보 개혁적인 시민사회 운동진영에 대한 온갖 의혹과 혐의들을 덧칠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들의 태도에서 실체규명을 위한 유보적이고 신중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시민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의 명예는 심각하게 훼손당했고 이 운동에 동참하고 공감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명예도 함께 훼손당했다.

우리는 사건의 실체와는 관계없는 일부 보수세력들의 시대착오적인 광기와 매카시즘적 행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번 ‘간첩단 사건’ 의혹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이번 ‘간첩단 사건’에 대한 무분별한 의혹제기에 앞서 사건의 실체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공안당국과 일부 언론들은 거리낌 없이 ‘간첩단’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구속된 5명은 간첩혐의가 아닌 회합통신 혐의로 영장이 청구되었고, 장민호씨를 제외한 4명은 ‘일심회’의 존재나 간첩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현 시점에서 이들을 ‘간첩단’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또한 이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추측만 난무할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나아가 이들이 간첩으로 규정할만한 행위를 한 것인지, 국정원이 제시한 문건들이 이들을 간첩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인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국정원의 무책임한 구태에 강력히 항의한다. 김승규 국정원장이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고정간첩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언론에 공표한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충격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장의 발언 후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정원은 왜 ‘간첩단 사건’인지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설사 국정원이 ‘근거’를 제시했더라도 내사 중인 사건을 공표한 국정원장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적 혐의사실 공표에 해당한다. 더욱이 국정원 직원이라면 지켜야 할 직무상 취득한 비밀에 대한 준수의무를 국정원 수장이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법행위가 국정원 일부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놀랍게도 국정원은 이 같은 명백한 불법행위에 대해 일언반구 공개적인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국정원이 아직 과거 냉전시대의 반인권적인 공안기구의 구태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정치적 행위자로 나서고자 하는 낡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국정원의 이 같은 행태는 두고두고 국정원의 권위와 위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을 국정원은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실체가 밝혀지지도 않은 사건을 두고 일부 언론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시민운동 진영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과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개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일부 언론들과 지식인들이 보여준 매카시즘적 행태는 우리사회가 과연 민주사회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일부 보수언론들은 국정원장의 발언을 계기로 실체도 불분명한 ‘공안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는 식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작문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냉전적 인식과 무리한 추론으로 가득찬 기사들은 이들 언론사들이 과연 취재대상이 되는 개인과 단체에게 가해질 인권 침해와 명예훼손을 예방할 최소한의 윤리적 법률적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케 한다.

심지어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지식인들은 피의자들이 묵비권 행사 등 조사에 응하는 태도가 과거 조직의 보안수칙과 같기 때문에 이들이 간첩단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국정원장의 교체와 수사환경의 변화 때문에 ‘간첩이 분명한’ 이들의 행위를 입증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상식이하의 반인권적 명예훼손과 이데올로기적인 정치공세를 일삼고 있다. 심지어 정치권과 시민운동 진영의 진보개혁세력들에게 “과거 행적을 고백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고백하라”는 식의 밑도끝도 없는 중세식 고백을 강요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기무사나 안기부가 밀실에서 민주인사들에게 강요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마녀사냥식 글쓰기는 추가적인 사실관계가 나타나지 않아 관련된 기사를 더 이상 쓸래야 쓸 수 없게 된 지금까지도 칼럼이니 기고니 하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욱 묵과할 수 없는 것은 보수언론들이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촛불집회나 평택미군기지이전반대운동, 반환기지환경오염 관련 활동에 이들 ‘유령의 간첩단’들이 깊숙이 개입한 것처럼 보도함으로써 모든 자발적이고 정당한 민주주의적 시민행동을 특정 정치세력 혹은 북한의 의도가 개입된 활동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의 공작금이 시민단체에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악의적인 보도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자발적 시민행동들을 ‘외부세력’의 지시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사회의 작동원리에 대한 몰이해이다. 특히 공개적 의사결정구조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을 특정 외부세력이 좌지우지 한다는 가정은 그 자체로 넌센스다. 우리는 악의적인 왜곡과 추측을 일삼고 있는 보수언론들의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이에 따른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남북간의 갈등과 대결이 낳은 냉전적 잣대와 색깔공세 속에서 정당하고 합법적인 행위에 대해서조차 친북이라는 이름의 주홍글씨가 새겨졌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지난 수세대에 걸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민의 역량으로 오늘의 민주사회를 일궈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역량을 바탕으로 대북포용정책을 확대해왔고 이에 따라 남과 북의 접촉 회수도 연 5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남한은 이미 성숙한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고 북한 당국은 인터넷을 통해 남한의 많은 정보를 손쉽게 입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간첩’의 정의는 매우 신중하고 엄격하게 내려져야 하며, 그 존재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그 역할에 대한 신경과민적인 과대평가도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

검찰의 수사가 아직 진행 중이며, 그 경과는 지켜봐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혐의자 중 누군가가 국가보안법상 특정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될 수도 있다. 여기서도 연루된 ‘죄’가 회합통신이지, 변란목적의 활동인지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다. 지난 2005년 제정된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도 남북한간의 관계를 단순한 적대관계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과는 달리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검찰이 국가보안법의 법률조항을 남용한다면 검찰 스스로 이 수사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결과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냉전시대로의 회귀는 우리 사회의 퇴보이다. 도를 넘어선 시대착오적인 공세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의혹사건의 실체가 규명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실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근거도 없이 시민운동을 매도하고 흠집을 내려는 시도들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의 진상과 관계없는 국정원과 보수 언론들의 명예훼손과 인권유린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2006년 11월 9일

KYC, 녹색연합,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민교협, (사)민족화합운동연합, 생태지평연구소, 울산참여연대, 좋은벗들, 참여연대, 충남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평화네트워크,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철거민협의회중앙회, 함께하는시민행동, 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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