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6 녹색의 눈 3 – 우리는 50년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2001.10.19 | 군기지

정명희 / 녹색연합 홍보팀

전만규 위원장과의 만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녹색연합이 처음 녹색순례를 시작했던 98년. 녹색순례단은 강화에서부터 부안까지 서해안 갯벌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에 순례단 모두가 뻘밭에 빠지고 추위에 손이 곱아 한걸음 한걸음 옮기기가 힘들었습니다. 겨우 뻘밭을 벗어나 들어간 마을이 매향리였습니다. 매화향기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곳. 비록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네 시골 어느 마을과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던 곳.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숙소로 정한 매향리 미군폭격 대책위 사무실에서 전만규 위원장님을 만나면서 바뀌었습니다. 마침 비가 와서 그날은 폭격훈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그래서 평온한 매향리였습니다. 그러나 50여 년 동안 매향리는 마을 전체가 폭격훈련장이 되어 전시와 다름없이 살아왔습니다.

1952년 12월 예고없이 미공군의 폭격훈련이 시작되었고 68년 소파협정이 체결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토지를 강제로 징발당했고 임산부가 포탄을 맞고 사망한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 금이 가고 사람들은 늘 소음에 시달렸지만 나라일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사시다 87년 민주화의 바람이 온 나라를 술렁일 때,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고 임산부들의 필수품이 귀마개라는 얘기, 마을 사람들 대개가 목소리가 크고 사소한 싸움 끝에도 꼭 칼부림이 일 정도로 성격이 포악해지고 있다는 얘기. 유난히 자살율이 높아 14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60년대 이후 서른 명이 넘는 자살자가 있다는 얘기. 11대 째 매향리에서 살아온 전만규 위원장님, 당신도 할복자살을 기도했었으며 그의 아버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우리는 우리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서울에서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몇 십 년동안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채 진행되고 있었던 것일까?
대책위 사무실에 놓인 미군이 훈련에 사용했던 포탄들 중에는 1미터 가량의 미사일도 있었습니다. 매향리의 아이들은 늘 그 포탄들을 보면서 그 소음을 들으면서 자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매향리의 바닷가에 있던 두 개의 섬은 오랫동안의 폭격훈련으로 흔적만 겨우 남아있었습니다. 미 국방부는 그들의 보고서에 매향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올해 5월 8일 매향리에서 오폭 사고로 인해 마을의 집들에 금이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4월 TV에서 방영되었던 매향리 보도탓이었는지,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아니면 오랫동안의 미군기지 반환운동의 성과물이었는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매향리를 찾고 폭격훈련으로 인한 환경, 건강문제에 관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향리를 찾은 6월 1일은 매향리 폭격장 철거를 위한 피스투어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전국의 미군기지 철거를 위해 애쓰고 있는 분들이 모이고 학생들이 모여 매일매일 평화의 투어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전만규 위원장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미끼로 물고기를 낚듯이 미군과 우리 정부는 우리 마을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찢어놓았다. 그러나 나는 주민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보상금이라면 그 보상금이 눈 앞에 놓여질 때까지 사격을 멈추게 하자라고 설득하고 있다. 5월 8일의 오폭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50여 년 동안 더 큰 피해를 입어 왔었다. 오폭 사건으로 여론이 일어나고 모든 언론들이 떠들어 대는 것이 나는 더 놀랍다. 이런 일은 늘 있어 왔고 이보다 더 큰 일들이 있었는데 그때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5월 8일 오폭이 있기 전에도 어민 수십 명이 조개채취를 하고 있는데 폭탄이 투하되었다.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미군측에 연락을 했는데도 폭격기 두 대가 다시 선회해 와서 폭탄을 또 투하했다. 몇 십년 동안 이런 일들이 있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싸워왔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일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 주민들의 마음이 나뉘고 현혹되는 것을 탓할 수가 없을 만큼. 이제 우리는 기지철거를 실행에 옮길 것이다. 기지로 인해 억눌려 살아온 억울한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한맺힌 가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기지철거를 위해 싸울 것이다.”

피스투어를 시작한 그날 마침 국방부와 미 당국이 5월 8일 오폭에 대한 자체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조사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피해가 없었다’입니다. 거기에 항의하는 투어단을 가로막는 이들은 우리의 경찰들이었습니다. 대책위 사무실 앞에서 행진을 시작하려는 투어단을 향해 도로 옆의 산에서 사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왔습니다. 산에 숨어있다 우리가 움직이길 기다렸다는 듯이. 제복을 입지도 않고 사복으로 모습을 가린 그들을 보며 마음은 더 슬퍼졌습니다. 오래 전 일본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철거 싸움이 한창일 때 오키나와 사람들을 가로막은 것은 적어도 일본의 경찰들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폭격훈련으로 파괴된 섬이 보이는 갯벌의 철조망을 따라 걷다 마주친 미군기지 입구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경찰들에게 제지당해야만 했습니다, 어디서도 미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 미군은 폭격훈련을 재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만규 위원장님과 매향리에 남아있던 분들은 폭격훈련 재개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전만규 위원장님은 경찰에게 구속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미군기지 철거를 위해 싸우시겠다고 한 전만규 위원장님의 의지를 다시 떠올립니다. 그리고 매향리를 통해서 폭발하기 시작한 미군기지 문제는 군산에서, 춘천에서, 용산에서 전국의 곳곳에서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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