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어서 지친 것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소음이, 이땅의 현실이 고달파서 순례단 한 사람 한사람은 더욱 피로를 느끼는 듯 하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 멀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오늘은 K-55 오산 미군 기지를 따라 한 바퀴 완전히 돌고 의왕시 백운산 기름유출사고 현장을 오른 후 다시 파주로 간다.
한국에 있는 쉰다섯 번째 기지라는 뜻인 K-55 오산미군기지 정문에는 신장쇼핑물이 있었다. 미군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세워진 쇼핑몰은 간판은 영어, 가격표는 달러로 되어 쓰여 있다. 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은 기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윤락가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성병검사를 미군에서 실시하고 있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군이 쇼핑몰 반대편까지 나와 출입을 통제했다고 한다. 미군의 기지 영외 통제는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지역을 이탈하여 권한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오산 미군기지의 우편 수신처는 캘리포니아 U.S.A, 일주일에 두 번 민항기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대한민국 외무부의 통제 없이 누구든 또 어떤 물건이든 오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행정력과 법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다. “검역체계가 미군에 의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열화 우라늄탄, 전술 핵 등 군수물품의 유입이나, 탄저균 등이 유입된다면 우리나라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허술함의 정도는 미군이 우호적인 지역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지주와 지역인사들을 초대하여 여권, 비자 발급 없이 알래스카 관광을 시켜주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이다” 순례단에게 기지를 안내해 준 평택의 미군기지 활동가 최일수(새물결청년회 통일분과장)씨의 말이다.
오산 미군기지는 200만 평의 땅에 미7공군 사령부가 있고 태평양 공군비행을 통제하는 곳이다. 매향리의 폭격사격도 이곳의 통제를 받아야 가능하다. 오산 미군기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제는 평택시 송탄 일대에 기지는 자리 잡고 있다. 평택에는 K-55 이외에도 4개의 기지가 더 있고 앞으로 2개가 더 들어올 예정이다.
순례단의 K-55 정문 출현에 잔뜩 긴장한 미군은 경찰차와 지프차를 앞세워 미군기지 철책 안에서 순례단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순례단에게 미공군기지 항공기 소음의 진수를 들려주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전투기의 연이은 출격과 착륙으로 걷는 내내 손으로 귀를 막아야 했고, 순례단의 머리 백 미터 정도 위로 낮게 날아가는 것도 있었다.
K-55 정문을 끼고 돌면 과거에 군수물자를 나르던 철로를 만나게 된다. 구(舊)탄약고에 탄약을 주로 나르던 이 철로는 70년 말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철조망을 쌓아두는 공간으로만 사용되고 있어 더 이상 군사목적의 땅이 아님에도 반환되지 않은 상황이다. 미군이 구탄약고의 대체 공여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탄약고 주변은 탄약성분으로 인한 토양오염이 매우 의심되지만 현재 어떤 조사도 실시할 수 없는 상태다.
K-55 후문을 지나면 농지를 길게 끊어 놓은 착륙유도등을 볼 수 있다. 구장터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착륙유도등은 까만 밤을 대낮처럼 밝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주변 비닐하우스 안의 농작물들은 백야 현상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장터가 열리던 마을로 지역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비행기 엔진에서 나오는 열기와 바람으로 생기는 후폭풍과 소음으로 마을에는 빈집도 늘어났고 대부분의 집들이 벽에 금이 가 있어 과거의 활기찬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미군기지로 수용될 이 마을들은 이제 지쳐 오히려 정부가 하루빨리 수용해 주기를 기다리기 까지 한다고 한다.
순례단이 이 곳에 도착한 한낮에도 착륙유도등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미군은 일반 전기료보다 35%나 싼 값으로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데다 그 전기료마저 상습체납하기 일쑤다.
K-55 철조망부터 진위천변 안쪽까지 모두 50만평은 새로 수용될 지역이다. “난 평생 농사 밖에 지어보지 않았는데 이제 돈 주고 다른 데에 가서 살라하면 뭘 먹고, 뭘 하며 사냐! 농지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주민들은 깊은 시름에 빠져있다. 초기의 미군기지 수용에 끝까지 거부했던 한 할머니의 집은 ㄷ자 모양의 외곽 철조망 안에 있다.
“소음이 심하죠?” 하고 가까이 다가가 크게 몇 번을 묻자 “괜찮아, 살만해”라고 대답하신다. 그러나 이미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고향을, 집을 지키는 일이 할머니에겐 귀가 먹는 아픔보다는 더 소중한 것 이었나보다.
사람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기지와 하천이 맞닿아 있는 곳의 땅은 단단했다. 발목까지 자란 풀들을 걷어내면 매립된 불법폐기물과 콘크리트들이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불법폐기물을 하천 앞에 버리고 이를 흙으로 살짝 덮어 놓은 것이다.
철조망 안으로 건축폐기물과 쓰레기들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도 잠시, 조금 앞으로 가자 복토를 위해 하천 흙을 퍼가고 복토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폐기물 적재와 매립은 지자체와 협의하여 진행해야 한다. 단순히 쌓여있는 경우에도 비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침술수가 생겨 주변의 물과 땅을 오염시킬 수 있다. 매립은 더욱 까다로워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는 어떠한 매립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미군은 어떤 절차나 조치 없이 매립과 적재를 오랫동안 지속해서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황구지천은 이미 썩은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기름을 퍼다가 팔았다.
미군기지로 입은 상처는 단지 소음만은 아니다. 멀지 않은 곳, ‘쐐기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명은 ‘금각교’이지만 주민들은 ‘쐐기다리’라 부른다. 즉 석유다리이다. 이곳은 미군기지의 기름유출 사고가 있었던 곳으로 항공유 JP-3 가 70∼150여 드럼이 유출되었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불을 붙이면 불이 물위를 둥둥 떠다닐 정도였고, 여기서 나온 기름을 퍼다가 팔기도 했다고 해 유출의 양과 정도를 짐작케 했다.
이곳에서 기름유출이 과거부터 계속 이어져 왔고, 지금도 장마 때마다. 대량의 기름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문제가 되자 평택시에서 5,000t을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하고 있지만 미군기지에서 생산되는 15,000t을 모두 처리하지 못한다. 전량처리가 되지 않고 있어, 나머지10,000t은 어딘가에 몰래 버려지고 있다.
오산 K-55 정문에서 출발해 걸어서 기지를 돌아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총 4시간 30분, 차로 한바퀴 돌려면 1시간 30분이 걸린다. 이 큰 기지에 다시 50만평이 확장된다고 한다. 군산과 평택에서 순례단은 주한 미군이 확실히 공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군산탄약고 중설, 평택기지 확장 및 탄약고 증설은 무기의 비축량이 더욱 증가한다는 것이고, 공군기지의 증설은 F-15K 항공기 구입과 일맥상통한다. 결국은 한반도가 미국의 MD 정책 추진을 위한 사전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미군기지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살 떨리는 사실이다.【녹색순례 특별취재팀 – 사이버 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