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빅, 클라크 기지를 다녀왔습니다.

2004.01.11 | 군기지

다섯 달 필리핀 생활을 정리하면서 짐을 싸는데
샐폰의 문자가 왔습니다.
밀라 발도나도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 우리 숙소로 직접 오겠다고 했습니다.
가만 앉아서 선물을 받는 것이 좀 그래서 제가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10월 중순이었던가요?
미군기지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작은 단체가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닭고기를 불고기마냥 붉은 물을 들여서 내오고,
자료를 한가득 복사해 놓고
안내해 주는 사무실 곳곳엔 하회탈이며, 우리나라 기념품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습니다.
참 정이 많은, 아기자기한 단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짧은 만남 덕에 우리는 11월에 수빅과 클라크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91년 4월에서 6월까지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흘러내리자
근처에 자리잡고 있던 미군기지가 황급히 떠나버렸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물이 부족해 우물을 파고, 관을 뚫어 지하수를 마셨는데
하룻밤 지나고 나면 물에 기름이 떠 있고,
약간 냄새가 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마실 수 밖에 없었다지요.
92년에서 94년까지 칵콤이라는 지역에서 2만 명이 모여 살았답니다.
그런데 점점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이 생기고
태어난 아이들은 뇌성마비나 정신지체 같은 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정부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 뒤 시민단체에서 마답답이라는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
이사한 곳을 추적할 수 있는 1300가구만 조사를 했는데
피부와 호흡기, 코 같은 곳에 암을 앓는 사람과 고혈압 같은 증세로
죽은 사람이 156명,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328명이었답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증세만 조사한 것이지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경우도 있어서 정확한 숫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답니다.
휠체어에 앉아 계속 침을 흘리는 8살 로멜은 아주 잘 생긴 아이입니다.
어떤 아이는 다리 전체에 흉한 종기가 나 있기도 하고,
심장병 수술을 한 차례 받은 ‘사이’라는 아이는
이유없이 계속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머리가 유난히 큰 아이,
다리가 자라지 않는 아이,
열 살이 넘도록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
수많은 희생자 아이들과 부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병이 생겨도 치료할 돈도 없고, 일자리마저도 없는 부모들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외국에서 찾아온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군기지 정화위원회 올랑가포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서른 살 레기나는 결혼을 하는 것도 두렵고, 아이를 낳는 것은 더 두렵다고 합니다.
미군기지 정화위원회 마닐라 본부 사무총장인 밀라 발도나도는
희생자들을 위해 일하다 감옥을 다녀오기도 하고 고문을 받은 적도 있었던
운동가입니다.
한때 미군기지 문제가 필리핀의 핫이슈로 떠올라 많은 사람들과 언론에서 다뤘지만
당사자인 미국 정부가 무관심과 발뺌을 계속하다 정권마저 바뀌고 나자
사람들도 흥미를 잃어버렸답니다.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자 후원도 줄어들고 단체운영도 점점 어려워졌답니다.
그렇다고 희생자들의 병세가 나아진 것은 아니지요.
10월초 미대통령 부시가 아시아 방문길에 잠깐, 8시간동안 필리핀에 머문다고 하자
며칠 전부터 많은 시민단체에서 반전평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미군기지 피해자들도 휠체어를 탄 아이들과 함께 미국의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지금 미군기지 정화위원회 마닐라 본부에서는 밀라 발도나도와 대표,
단 두 분이 일하고 있습니다.
마닐라와 수빅, 클라크 지역을 열심히 오가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미군기지 피해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에
함께 손잡고 일해 보자며 두 손을 맞잡는 사람들입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수빅과 클라크 아이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사무실을 숙소로 만들어 밤낮없이 일하는 정많은 밀라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여행을 다녀온 곳이라,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눈 사람들이라서
정이 더 가는 것만은 아닐겁니다.
큰 병을 얻어 하루하루 죽어가면서도 어디에 하소연 할 곳 없고,
손을 내밀어도 함께 손 잡아줄 사람들이 없는 그들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함께 손 잡아줄 님들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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