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죽음을 심어놓고 떠난 미군 – 나효우

2004.01.15 | 군기지

2003년11월20일 제485호  

[필리핀] 죽음을 심어놓고 떠난 미군
미군이 남겨놓은 독극물에 아이들마저 고통받는 클라크 · 수빅 기지 주민들

지난 10월 초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할 즈음 수백여 명의 시위대가 미 대사관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근육위축증을 보이는 아이들의 휠체어 행렬과 이들이 치켜든 “미군기지, 더럽혀진 땅을 깨끗이 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후 한달 뒤,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난 곳은 이제는 미군들이 떠나버린 미군기지 부근 마을이었다. 3년 전 클라크 공군기지를 필자가 처음 방문했을 때는 기지에서 흘러나온 각종 독극물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첫 재판을 하던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관심을 끌면서 시작된 재판은 10월부터 시작된 에스트라다 당시 대통령 하야 시위에 묻혀버렸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 국제재판을 준비했던 시민단체 ‘미군기지 정화위원회’는 부시 정부가 들어서자 유엔 인권위의 진상조사단 파견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정부가 ‘죽음의 기지’에 주민 이주시켜

필리핀에서 100여 년을 버티고 지냈던 미군이 철수한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민중들의 저항과 정부의 끊임없는 협상 노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1986년 아키노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군 철수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1989년까지 철수하겠다는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미국이 처음 필리핀에 침략했을 때부터 터를 잡은 미군기지는 월남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고, 더구나 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주둔 연장을 위한 정치적인 협상을 계속 진행한다.
계속되는 미군 철수 시위에 이어 1991년 4월,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본격적인 미군 철수가 시작되었다. 당시 미군들은 부랴부랴 철수를 하면서 폐유와 다양한 화학물질들을 어딘가에 폐기했다.
화산 폭발로 이재민이 생기자 지방정부에서는 미군이 철수한 기지 내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본격적으로 이주를 시작했던 1994년부터 2년 동안 약 2만여 세대가 정착해 살았고, 이들은 약 200여 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우물 물을 길어다가 먹다보면 이상한 기름기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설마 했다. 미군들이 있었던 곳이라 어느 곳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다수 주민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약간 냄새’가 나는 물로 벼농사를 짓기도 하고 식용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넓고 잘 정돈된 편의시설과 도로, 깨끗이 잔디로 꾸며진 미군기지 밑으로 각종 폐유와 독극물질이 묻혀 있고 지하수로 스며들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미군들이 우리 땅을 이용하고 물러가면서 기지를 어떻게 사용했고 폐유와 각종 화학 독극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어떤 정보도 우리는 건네받은 적이 없었요.”
지역주민의회 의원인 만디는 그 자신의 가족 역시 피해자였다.
오염된 땅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피해는 해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당시 미군기지 안에서 살았던 주민들이 새로 정착해 살고 있는 ‘마답답’ 지역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피해조사를 했다. 조사가구 1,032가구 중에 156명이 몇 년 사이에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이 중 36명이 각종 암으로 사망했다. 또한 328명이 각종 피부질병과 심장병 등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 욜리(47)는 당시 미군기지 안에 거주했을 때 딸 사이라(7)를 임신하고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양한 독극물을 머금은 사이라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다. 다행히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으로 수술을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이유 없이 계속 눈물이 난다고 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먹은 독극물

독극물 피해 주민들은 기지 밖에도 존재한다. 알린 사모라(15)의 어머니 마리타(38)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지 부근에서 살았다. 그가 결혼한 뒤 낳은 아이 세명 중에 두 아이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다. 당시 미군들은 주변환경을 정화한다는 이유로 살충제의 일종인 DDT를 수시로 마을이나 인근 하천에 대량 살포하였다고 한다. 한참 귀여울 나이의 사모라의 발톱은 흉물스럽게 다 빠져버렸다. 그의 마음속 깊은 상처도 자랄수록 깊게 패인 듯 사람들과 만나는 것조차 꺼린다. 다른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에는 안타깝게도 어린아이들이 모두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10대 아이들이었다. 뇌중심부에 있는 뇌실에 수액이 차는 수두증을 앓고 있거나, 근육이 위축되는 근위축증(베르드니히-호프만병) 등 희귀병을 여기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가 병들면 처음엔 자신의 탓으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피부질환이거나 선천성 심장병이라 할 때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듯 숨죽여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미군기지 독극물의 피해로 모두들 비슷한 희귀병에 신음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는 턱없이 비싼 의료비 때문에 다시 가슴 아파해야 했다. 그렇게 소리 없는 전쟁터 속에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내버려졌다.

클라크 공군기지를 방문한 뒤 미 해군기지가 있었던 수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빅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십여 명이 함께 잘 수 있는 해군 내무반에서 짐을 풀고 저녁 늦은 시간에 밤거리로 나섰다. 미군기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매매춘이 성행하고, 그들만의 기지촌 문화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클라크 공군기지 부근에 앙헬레스 시가 있듯이, 이곳 수빅에는 올롱가포 시가 있었다. 미 해군 선박이 들어서는 날에는 이 자그마한 도시의 밤거리에 한때 1만6천여 명의 매매춘 여성들이 거리를 메웠다고 한다. 본인 역시 미군을 상대로 바에서 일을 했다. 매매춘 여성들의 인권과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일하는 단체의 대표인 엘마에 따르면 지금은 매매춘 여성이 2천∼3천 명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이곳에 상주하는 기업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성업 중이라고 한다. 미군은 떠났지만 기지촌 문화는 그대로 남은 셈이다. 이슥한 밤거리 어디에서든 약간의 돈만 주면 섹스를 할 수 있고, 밤늦은 술집과 디스코텍에서는 하룻밤 상대를 찾는 젊은 남녀로 붐볐다.

환락의 밤, 바닷가 도시도 아침 햇살은 따사로웠다. 수빅 해안선을 따라 큰 선박들이 늘어선 곳에서 30여 년간 기지 내에서 일한 사람들을 만났다. 수빅의 독극물 피해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5년 이전까지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다루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을 뿐더러 각종 폐유와 방사능 오염물질을 인근 야산이나 한적한 곳에 땅을 파서 그냥 부어버렸다고 한다. 인체에 극히 해롭다는 석면가루와 각종 화학물질을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다루었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폐질환이었다. 미 해군기지에는 평소 약 6천여 명의 미군들이 주둔했으며, 필리핀 노동자들은 약 3만7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필자가 만난 파브릴(69)은 해군 선박을 보수하는 책임을 오랫동안 맡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선박 수리를 맡았던 노동자들 8천여 명 중에 3천여 명이 각종 질병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하루 12∼16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몸이 아파도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아픈 사실을 숨긴 이들이 많았다. 기지 내에서 각종 독극물에 노출되어 일했던 이들의 가족 역시 클라크 공군기지 부근에서 보았던 각종 희귀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철저한 정보 공개와 보상을 요구하다

미군기지 정화위원회의 발도나도 사무총장은
“미군들이 사용했던 기지들에 대해 정부는 어떤 환경조사도 없이 개발만 서두른다.”
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많은 노동자들의 양심선언과 주민들의 피해 사례를 통해서 사실을 조금씩 밝힐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피해 주민들의 요구가 궁금했다.
“주민들은 미군의 기지 사용에 대한 정보 공개와 파괴된 환경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화작업, 그리고 피해 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길 원한다.”

넓고 깨끗한 도로시설과 푸른 잔디로 뒤덮인 클라크와 수빅 미군기지, 필리핀 정부는 이곳을 관광단지 조성과 경제특구 지역으로 조성하기에 분주하다. 하지만 얼마 전에도 일본의 한 우유공장이 이 곳에 입주하려고 사전조사를 했다가 환경피해 사례를 접하고는 화들짝 놀라 철수했다. 이곳에는 소리 없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마닐라= 글 · 사진 나효우 전문위원 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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