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빅과 클라크의 비극 – 임낙평

2004.01.23 | 군기지

* 함께 수빅, 클라크를 방문했던 광주환경련 임낙평 님의 글입니다. 이 글은 아시아센터 2기 연수보고서의 일부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같은 비극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누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 마디로 끔찍했다. 아이들을 그냥 바라보기도 민망했다. 그들 부모들의 품에 안겨서, 휠체어에 누워서 온 아이들은 정상아이들이 아니었다. 가슴 한 켠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들의 부모와 주민들 앞에서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쓸 수 밖에 없었다. 환경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0월 말, 91년까지 미군의 공군기지와 해군기지가 있었던 클라크(Clark)와 수빅(Subic)을 방문했다. ‘미군기지 정화위원회(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 up)’라는 민간단체의 관계자가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거기서 미군의 독성폐기물에 의한 오염피해자들을 4차례나 만났고, 더불어 어린이 피해자들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그들의 거주지 마을 회관 같은 곳(주민조직의 회합장소이고 사무실)에서 만난 어린이들만도 30, 40여 명으로 두 살배기에서부터 15세 전후의 아이들이었다. 뇌기능장애로 항상 누워지내야만 하는 아이, 10세가 넘었다는데 4, 5살에서 성장이 멈춘 아이,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아이,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 7, 8세가 되었어도 말을 못하는 아이, 백혈병 증세로 대머리인 아이, 만성적 피부질환으로 고생하는 아이, 그리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대두아…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가 낯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호소하고자 자녀들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 동안 자료를 통해서 미나마따와 아따이이따이 공해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베트남전 이후 네이팜탄 같은 것 때문에 베트남이 기형아출산율이 높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다. 또, 2차 대전 이후 국내 피폭2세, 3세들의 슬픈 이야기도 분노하며 읽은 적이 있다. 특히 여기서 만난 대두아는 내가 10여 년전 전남 영광의 원전 주변에서 봤던, 그리고 피폭의 영향일거라며 확신하며 원전당국과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렇게 면전에서 집단으로 피해환자들을, 그것도 어린이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만난 대두아는 여러 명이었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현대의학을 통해서 정상인 아이들처럼 치료될 수 없는 선천적인 질병을 기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 중에는 치료를 받으면 정상아로 회복되는 아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만난 아이들은 살아있으나 그 사이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들,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어간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지금도 기지 주변에 과거에 살았던 수많은 주민들이 계속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 어린이들과 같은 아이들이 계속 태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필리핀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진상규명을 위해 필리핀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환경단체나 주민들의 주장하듯이, 환경파괴의 근원적 원인을 제공했던 기지의 전주인이었던 미국정부는 책임을 인정하고 상응한 조치를 취했을까?

  지난 10월 중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필리핀 방문 때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은 미국의 책임인정과 상응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보내고,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한 바 있다. 물론 필리핀 정부에도 양국 정상회담의 의제로 이 문제를 다루어 주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미국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전미군기지였던 클라크와 수빅 주변의 미군의 독성폐기물에 의한 오염사건은 이 나라 최대의 환경이슈였다. 수년째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이 거대나라 미국과 성의없는 필리핀 정부를 향해 싸우고 있다.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오염의 피해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염사건의 경위는 지난 91년부터이다. 이 해 미국은 필리핀 정부와의 군기지 반환약속에 따라 내륙지방의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만의 해군기지를 반환했다. 그쯤, 클라크 기지 인근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필리핀 정부는 그들을 미군이 떠난 공군기지 내에 임시 가옥으로 이주시켰다. 2만이 넘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기지 내의 임시 거주지에서 살아야 했다. 기지주변의 환경이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쩔 수 없고, 그들은 우물을 파서 식수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화근이었다. 기지내의 토양과 지하수가 독성화학물질로 오염된 뒤였다. 기름기가 느껴지고 역한 냄새가 풍겼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고 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 빈곤한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해가 가면서 주민들 사이에 건강상의 이상이 발생하고, 유산하는 여인과 비정상아를 출산하는 일이 속출했다. 90년 중반이 되면서 주민들의 이런 일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자 기지주변의 다른 지역에서도, 해군기지가 있었던 수빅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알려졌다. 주민들은 미군의 독성폐기물을 의심했고 환경단체들이 가세했다. 미군기지주변의 오염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초보적인 조사가 진행되었고 미군의 독성폐기물에 의한 영향이라는 잠정적 결론이 내려졌다. 필리핀 정부는 기지 내 주민들을 다시 이주시켰다.
  미군당국은 기지를 철수하면서 폐기물의 처분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고, 사회적 문제로 부가될 때에도 그들은 모른 체 했다. 민간차원의 조사도 독성폐기물에 의한 토양과 지하수와 수질의 오염으로 조사되었지만 종합적인 오염의 정도와 과정, 그 영향과 폐해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었다. 혹시 이런 일이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혼자 상상해봤다. 아마도 시끄러웠을 것이다. 미군의 자국 영토 내 기지는 자국의 환경관련법률에 따라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타국의 미군기지는 미국 법을 따를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그 나라의 법률을 준수하지도 않는 치외법권의 영역이다. 클라크나 수빅에서 기지 폐수의 처리시설이나 위생적인 매립시설, 혹은 독성화학물질의 안전한 처리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마도 한국의 미군기지도 유사할 것이다).

  클라크와 수빅은 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군용항공기와 함선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것들을 수리하는 거대한 시설과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대한 저유시설과 탄약고가 있었다. 상시 훈련을 위한 시설, 공군의 사격훈련장, 대피소며 격납고, 지휘 및 정보관련 시설, 병원이며 숙소 등이 있었다. 어느 대단위 공단에 준한 시설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기지가 운영될 때 기지의 속성상 많은 독성폐기물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선박과 항공기의 운행 및 수리과정에서 각종 기름찌꺼기며 화학성분의 폐기물 등이 수시로 나왔고, 필리핀 노무자들에 의해서 무단 폐기되었다. 기지주변의 지하수와 토양, 그리고 하천에서 검출되었다는 석면, 비소, 벤젠, 톨루엔, 솔벤트, 카드뮴, 납, PCB, 살충제 등은 독성폐기물의 무단폐기를 입증해주는 증거이다. 이들 물질이나 이를 함유한 쓰레기 등은 절대 자연계에 방치해서는 안 되는 물질들이다. 기지가 폐쇄되면서 기지 안팎에서 많은 주민들이 오염물질들을 먹이사슬을 통해 섭취했고, 그 결과 그들뿐 아니라 2세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클라크와 수빅의 독성폐기물 오염사건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고, 나름대로 상당한 증거도 없지 않으나 책임지는 가해자가 없다. 수많은 가난한 주민들이 가난과 공해피해의 이중 피해를 당하고 있고, 죄 없는 어린 피해자들이 속출하건만 가해자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막강한 미국정부가 그들의 책임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트라다 대통령 시절(이전 대통령으로 부패행위로 인해 하야함)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이문제로 미국의 클린턴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유야무야 되었다고 한다. 환경단체들이 앞장서고, 지역의 주민들도 모임을 결성해 진상의 규명과 책임추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고, 어린이 피해자들의 치료 등 피해자들의 복지를 위해 뛰고 있으나 역부족인 듯 하다.
  과거 미군의 아시아 최대기지로 동부 아시아와 인도차이나, 태평양과 인도양의 전략요충지의 역할을 수행했던 두 기지는 미군이 나간 직후 필리핀 정부에 의해 특별경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정부는 클라크와 수빅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 명성을 지켜가면서 산업과 상업, 관광산업의 거점으로 개발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필리핀의 기업들과 외국의 투자자들이 극대 이윤을 추구하고자 몰려들고 있고, 화려한 서비스 시설과 고급 리조트들, 공장들도 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이었다. 과거 기지의 바깥에는 여전히 가난한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고, 미군의 독성폐기물 오염사건으로 큰 고통과 슬픔이 계속되고 있건만 필리핀 정부는 이에 무관심하다. 오직 경제와 개발, 돈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민들의 그것을 그들의 치부로 생각하여 덮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환경정의는 구현될 것인가? 아시아, 아니 세계적 차원의 비인간적이고 반환경적인, 부정의한 일이 계속될 것인가? 아직도 어린 피해자들이 눈앞에 선하다. 얼마나 많이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저들에게, 죄 없는 저 어린이들에게, 가련한 피해 주민들에게 언제쯤 평화가 깃들 것인가? 한반도 남쪽의 미군기지와 그 주변은 아무런 이상이 없을까? 미군이 나간 다음 저 땅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수빅만이 내려다 보이는, 과거 미 해군의 군용막사로 이용했다가 지금은 여행객들의 호텔로 탈바꿈한 곳에서 하룻밤 유숙하면서 나는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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