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민중의 힘(Peoples Power Two), 그 5일간의 기록 – 나효우

2004.01.23 | 군기지

* 이 글은 한겨레21에 2001년 2월 6일 기고한 글입니다. 당시 시기와 정치상황이 지금은 다르지만 역사적인 현장, 피플파워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다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비디오 테이프 또는 기록책자는 National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필리핀의 민중의 힘을 받들어 새로운 대통령이 됨을 엄숙히 선서한다”.
싱그러운 햇살이 한 낮을 뜨겁게 달구는 지난 1월 20일(토) 오후 12시 24분,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인 에드사(EDSA) 성당 2층 간이 무대에서 필리핀의 제14대 대통령 막파갈 아로요(54세)가 탄생되는 순간이다. 지난 1986년, 피플 파워(Peoples Power 1)에 의해 당선된 코리 아키노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에드사 광장에서 민중의 힘(Peoples Power 2)에 의해 태어난 두 번째 대통령,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에드사 제2대 대통령이라 부른다.
20여 년간 군부독재하에서 인권을 유린당했던 필리핀 민중의 힘은 지난 1986년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1991년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미군 철수를 이루었고 21세기가 시작되는 금세기초, 부패한 에스트라다(에랍)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의 민중의 힘 – 피플 파워 2. 이날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피플(민중)들의 환호성에는 썩은 정치, 부패정권을 갈아엎은 필리피노의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이 피플 파워 2가 탄생되기 전까지는 숨막히는 일촉즉발 결전의 순간들이 있었다. 지난 1998년, 3대 정당의 연합의 지지를 받으면서 에랍이 집권할 당시만해도 역대 대통령 사상 가장 많은 득표를 얻으면서 인기를 한 몸에 안았지만, 개인 사생활에서부터 갖은 부패의 의혹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3월부터 종교계에서 에스트라다 가족들이 정부 보건 기금 1천50만달러를 전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데다가 7월 중순에는 언론계에서도 에스트라다가 수 명의 정부와 교제하면서 이들을 돕기 위해 축재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사실 작년에는 에랍정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악재가 있었는데, 지난 해 4월 중순, 이슬람 과격단체인 아부샤아프에 의해 인근 말레이시아 부근에서 여행중인 외국인 24명을 납치, 인질로 붙잡아둔 사건에서부터 강태풍이 몰아치는 7월 중순에는 필리핀 수도인 퀘존시의 쓰레기 매립장, 파야타스 주민 1천여명이 쓰레기에 압사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바깥으로는 필리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태국의 바트화가 연일 하락추세를 보이면서 국내 경제가 곤두박질 치는 때였다.
더구나 8월에는 에랍정부의 기름인상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이 계속되었음에도 이렇다할만한 대안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페소화는 급기야 수개월만에 약 15% 화폐 절하를 보인다. 그리고 지난 해 10월 9일, 그의 오랜 옛 동료인 루이스 싱손 주지사가 불법 도박 자금과 담배세에서 빼돌린 자금 약 1천2백60만 달러를 에랍에게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 결정적인 정치몰락을 맞게 된다. 불법자금 폭로사건은 필리핀의 최대 영향력을 과시하는 가톨릭계의 대부, 신 추기경에서부터 당시 부통령이었던 막파갈 아로요 그리고 민주화의 상징인 코리 아키노 전 대통령과 라모스 전 대통령이 에랍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면서 에랍 퇴진운동은 파고를 타게되었다.

지난 해 10월 29일, 마침내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제2차 시민사회민주회의(콤필 2 : KOMPIL II, 제1차 시민사회민주회의는 1984년에 소집되어 1986년 마르코스정부가 물러가기까지 2년간 운영되었다. 콤필은 시민사회의 총역량 한데 모으는 임시공동투쟁체)를 구성, 좌파정치 단체에서부터 노동, 농민, 빈민 등 민중운동그릅과 시민운동, 전문직 언론계 심지어 비즈니스 클럽 등 사회각계 각층이 한데 연합하여 ‘에랍 하야’ 공동전선을 구축되면서 운동의 조직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
이렇듯 에랍 하야의 대중적인 힘이 급류를 타자 에랍 정당의 소속 의원들마저 올해 5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민심의 눈치를 보면서 탈당사태가 이어졌다.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에랍하야 대중집회는 필리핀의 독특한 15일간의 크리스마스 시즌 연휴와 연초에도 쉬지 않고 열리면서 정치 파고는 더욱 거세진다. 지난 해 11월 4일(2001년), 탄핵안소추 자체가 안될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하원의원 85명이 탄핵안에 동의 서명하면서 지난 해 12월 7일, 마침내 역사적인 에스트라다 탄핵재판이 상원의원 22명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3분의 2인 15명이 탄핵을 의결해야하는데 절반 이상이 에랍의 지지세력이기에 탄핵의결은 불가능한 것으로 예측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22일, 클라리사 오캄포 이퀴터블 PCI 은행 부행장이 에스트라다가 은행계좌에 있는 돈을 이용, 5백만 페소(미화 1천만달러) 규모의 투자계약을 가명으로 서명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등 에스트라다의 가명으로 된 비밀계좌에 약 6천 6000만 달러(약 730억원)가 예치되어 있다는 새로운 혐의에 대해 조사실시 여부를 놓고 탄핵심판의 새로운 쟁점이 되었다.
2년전 에스트라다가 신고한 재산 액수가 67만3천 달러였으니, 그 사이 재산을 100배로 불린 셈이다. 그러나 올해 1월 16일, 상원의원으로 구성된 탄핵재판에서 새로 드러난 에스트라다의 비밀 계좌에 대한 조사실시 여부를 표결에 붙여 11대 10으로 부결시키자 탄핵재판 검사 11명과 아킬리노 피멘텔 상원의장이 집단적으로 사표를 던졌다. 탄핵안은 22명의 상원의원 가운데 3분의2 이상인 15명이 찬성해야 가결되기 때문에 11명이 에스트라다 편이라면 2월 12일 예정인 탄핵 결정내용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밤, 사람들은 에드사에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에드사의 피플파워 5일간의 역사적인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16일(화) 밤, 절망에 빠진 그들은 누가 뭐라 할 것없이 에드사 성당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휴대폰을 이용하여 가까운 친구들에게 연락을 시작했다. ‘우리 모두 에드사에 모이자’라는 아주 짧막한 메시지는 이날 밤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았고, 자정 가까이 되서야 운동의 지도부들은 긴박하게 임시 상황실을 에드사 성당 부속건물 2층에 설치하였다.

16일 밤부터 시작된 에드사 광장의 농성, 이들은 5일간 단 한시도 쉼없이 거리에서 먹고 자면서, 에랍 하야를 외치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급기야 이 날부터 긴급 방송프로그램을 편성, 생중계로 이들의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대규모 시위를 취재하게 되고, 방송을 통해 본 많은 시민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들을 바리바리 준비해서 상황실을 통해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20여 미터 정도 길이의 성당외벽 2층무대에서는 한시도 쉬지않고 춤과 노래, 퍼포먼스 그리고 시위참여자들의 눈물어린 호소가 이어졌고 유명 방송연예인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부패정권을 규탄하는 외침이 끊이질 않았다.
17일(수) 아침, 70대 고령의 라모스 전 대통령은 아침부터 거리에서 웃통을 벗어 던졌다. 하얀 런닝에 특유의 궐련을 입에 물고 그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과 에랍하야를 표현하는 침묵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계획에 없던 이 돌출 행동은 처음에 수십 명에서 시작되어 에드사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수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수십만 명의 군중이 가득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밤을 같이 지새우면서도 볼 수 없었던 얼굴들이 눈에 들어와 있었다. 젊은 10대, 20대들이 밤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힢팝 바지차림에서부터 갖은 머리 치장을 청년들이 밤새 필리핀의 민주주의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의 대학교 교수들의 시위 참가서명, 종교계, 의료계의 동참은 이들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저녁무렵에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퇴근을 하고 다시 밤샘을 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에드사 인근 전철 오리타가스 역에는 시위 참가자들로 붐벼있었고, 거리에는 에랍하야가 새겨진 티셔츠 그리고 노래 테이프를(노가바) 파는 노점상의 불빛이 가득했다.
18일(목), 유난히 날씨가 쾌청했다. 에랍이 머물고 있는 말라카냥 궁에서는 긴급회동이 있었다. 비밀계좌 수사가 부결된 16일의 탄핵 심판회의 때의 기쁨의 얼굴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침통한 분위기속에서 오는 5월에 임시 대통령 선거를 제안하자는 내용이 논의되었고, 자신이 물러날 경우를 대비한 신변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물밑 접촉을 논의하고 있었다. 미국의 동향도 궁금했다. 그러나 미국주재 필리핀 대사관에서는 애초의 계획인 에랍지지 성명을 유보키로 한 소식만 들려왔다. 군부와 경찰의 움직임이 잡히질 않고, 점점 초조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언론은 에랍하야를 외치는 시위대가 전국적으로 2백만 명에 달한다는 소식만 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모두들 에랍에게 등을 돌리는 듯 보였다. 한때 에랍의 연인관계 였던 영화배우는 에드사 집회에 참여하여 시위군중앞에서 에랍의 부패함과 추함을 폭로하고 있었다.
이 날 저녁, 여성 노동단체들이 꾸민 공연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 그리고 정치인들의 이합집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처절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는지를 표현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절망의 눈물을 삼키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하고 말겠다는 민중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19일(금) 오전, 피플 파워는 마침내 군부를 흔들었다. 앙헬로 레예스 군 참모총장과 오를란드 메르카도 국방장관, 호세 파르도 재무장관을 포함한 군.경. 재계 관료들이 집단 사임하고 반(反)에스트라다진영에 합류한 것이다. 이들은 사임직후 곧바로 에드사 성당으로 모였고, 이들을 환영하는 군중은 에드사 광장을 넘쳤고 거리의 차들은 에랍하야를 외치는 경적이 내내 끝날줄 몰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3시, 이들은 에드사 광장부근 한 건물에서 비공식적 모임이 있었다. 콤필 지도부와 군부 수뇌부가 모인 곳에는 이미 아로요 부통령, 라모스와 코리 아키노 전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에랍이 하야할 것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말라카냥으로 대규모 행진을 선포한 상태였다. 상황실을 통해서 들어오는 각종 정보들은 시시각각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에랍을 지지하는 지지파들이 집회를 훼방할 계획이라는 것에서부터, 일단의 극좌파에서 100여명에 무장 게릴라들이 에랍하야를 위한 무장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 그러한 가운데 전국의 20여개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에랍하야를 외치며 거리 밤샘 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군부에서는 에랍의 사면을 전제로 에랍 하야를 중재안으로 내놓았다.
매일 오후 3시, 각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콤필 정기회의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이 말라카냥으로 행진을 하자는 것에서부터 신중론을 제기하는 입장까지, 이미 19일 오전의 대규모 말라카냥 행진을 연기해 놓은 상태이기에 이 날의 회의는 마지막 결전을 놓고 설전이 오고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19일 자정쯔음에 말라카냥을 향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일(토) 아침 6시 먼동이 틀 무렵, 드디어 시위군중들은 에랍 하야를 외치며 말라카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로요 부통령과 종교계 지도부들은 유혈 충돌을 우려하면서 행진을 자제할 것을 콤필 지도부에게 거듭요청하는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 휴대 전화는 상황실 책상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전화를 받지 않으려 하지 않았다.
아침 8시 40분경, 말라카냥에 가기 위한 관문인 멘디올라에는 갑자기 몇발의 총성이 울렸다. 에랍 지지파와의 이미 자정부터 인근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와 부딪히면서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경찰이 현장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있는 자를 체포, 상황은 유혈로 치닺지 않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에드사의 대규모 행진부대는 너나 할 것없이 말라카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통령궁 경호실에서는 만일 대통령 진입 기도시에는 유혈사태를 경고했지만, 이미 86년도에 마르코스 정권의 총칼을 무너뜨린 피플 파워, 그들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전 9시53분경 에스트라다 핵심 측근인 마이크 베라르데는 “대통령 하야 준비”를 발표하였고 12시 19분,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TV연설을 통해 “대법원 결정을 수용하며 물러나겠다”고 발표 한다. 부패정권이 마침내 피플 파워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피플 파워에 의해 탄생된 아로요 대통령 취임식 2시간 후인 토요일 오후 2시18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군부대 경호 속에 가족들과 함께 거리의 군중을 피해 자그마한 모터 보트를 타고 파식강을 가로질러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필리핀의 피플 파워, 아시아 미래를 향한 21세기 첫 걸음 이로써 지난해 10월 29일 제2차 KOMPIL이 구성된지 약 3개월만에 그리고 대규모 군중집회가 있은지 5일만에 드디어 대통령 하야를 극적으로 끌어내었다.

이번 피플 파워에는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15년만의 부패정권을 갈아없는 대중운동의 값진 승리 즉, 우리로써는 이미 10여 년전에 87년 6월항쟁을 끝으로 용도 패기한 대중운동의 힘으로 개혁의 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둘째,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운동, 참여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운동이었다. 역대 군부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첨예한 대립투쟁 양식을 벗어나 5일간 단 한시도 쉬지않고 다양한 집회를 끌어내는 운동의 저력을 볼수 있었다. 전통적인 시위문화에서 들을 수 있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에서부터 에랍하야를 위한 웹사이트는 물론이요,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시위 문화로 10대, 20대의 대중적 참여를 보장했을 뿐만아니라 그들에게 피플파워에 참여했음을 큰 자랑거리로 삼게하였다. 이 피플파워는 인근 인도네시아에도 영향을 미쳐서 와히드 하야운동에 에랍하야 상징인 엄지손가락을 아래 방향으로 흔드는 사인을 쓰게 하였다.
셋째로 필리핀 공동의 의제를 향한 다양한 집단들의 공동전선을 둘 수 있다. 사실 필리핀 만큼 복잡다단한 운동도 없을 것이다. 무장투쟁을 통한 혁명을 꿈꾸는 단체에서부터 비즈니스 클럽에 이르기까지 그 주장과 방법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집회장소에서 보여지는 구호도 참으로 단체 깃발수 만큼 다양하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지난 1980년대 초반에 전국의 단체들이 시위와 관련된 하나의 공동 의제를 채택할 정도였다. 깃발 크기에서부터 구호와 사전에 정하면 그대로 실천하자는 일종의 협약이다. 이번 시위에서도 다양한 주장을 ‘에랍 하야’라는 공동의 목표를 약속한 첫 번째 회의 이후 그 약속을 파기한 집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넷째, 물론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국가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시사점은 누구나 부패한 정치를 하면 제3의 피플 파워를 소집한다는 것, 그리고 끝내는 승리한다는 자신감이 필리핀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렸다는 점에서 정치 사회 개혁을 향한 긍정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이들에게 남을 과제들이 많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페소화와 주식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세계화 문제 특히 빈부격차와 가난의 문제를 당장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그래서 이번의 피플파워를 이끌었던 주요한 사회단체 대표들은 아시아 사회개혁 네트워크를 조심스럽게 소망하기도 한다.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