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계의 홍보방법! 원고기고~낭기만원계 심산 님의 활약^^

2004.03.25 | 군기지

낭기마을 만원계 ‘심산’ 님의 글입니다.
이곳저곳 홍보를 다양하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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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년전부터 엉뚱하게도 법률전문잡지인 <시민과 변호사>에 ‘깊은 산의 초대’라는 산악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낭기마을 돕기에 대해서 썼습니다. 원고마감 시한에 쫓겨 거의 비몽사몽 써갈긴 글이라 누구에게 읽어보라고 하기가 참 뭣한 글이지만…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관계된 글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다시 읽어보니까 약간 ‘오버’한 데가 많네요).^^

  아 참, 김홍성 선생님, 이 기회에 선생님께도 원고청탁 올립니다. 수문출판사에서 출간예정인 ‘숲과 산’에 대한 책(제목 미정)인데, 선생님께서 낭기마을의 성스러운 숲과 한국의 만원계에 대하여 써주셨으면 합니다. 200자 원고지 50장 내외…산림청에서 지원해주는 출판사업이라 원고료도 두둑하다고 합니다…^^ 제가 따로 정식으로 청탁 올립지요!

   깊은 산의 초대

   낭기의 친구들
   -네팔 히말라야 오지의 산간학교 돕기

   신혼 초의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꿈에 그려왔던 히말라야 속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주마간산 식의 산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느꼈던 벅찬 희열감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거대한 존재로 그곳에 우뚝 서 있었던 히말라야는 그 자체로 신의 존재와 축복을 증명하는 듯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산악인 겸 작가 존 뮤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의 지속적인 창조와 존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당시의 산행에서 히말라야 못지 않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곳 산자락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한 눈빛을 가졌고 금세 마음을 열고 다가왔으며 건강한 경건성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지리도 가난했다. 그 가난은 어떤 뜻에서 잔인한 형벌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당신들은 가진 것이 없지만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배 부른 자의 모독이다. 나는 미리 그곳을 다녀갔던 산 선배들의 조언대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연필이며 공책 그리고 머리핀 따위를 챙겨갔지만 그들에게 내미는 내 손길이 왠지 초라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트레킹이 끝나갈 즈음 영어에 꽤 능통한 포터 하나가 자꾸만 말을 붙여왔다. 잔뜩 포장을 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무언가를 더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팁에 덧붙여 내 옷과 신발까지 벗어줬다. 녀석은 더 나아가 자기와 함께 사진을 찍어야 되며 그 사진이 나오면 꼭 보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왜? 자기에게는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자랑하기 위하여, 그래서 결국엔 포터에서 가이드로 승격하기 위한 증빙자료로서 사용하기 위하여. 충격적인 것은 이 친구의 학력이다. 녀석은 자기가 카트만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카트만두대학이라면 우리 나라의 서울대학이나 마찬가지다. 그곳의 영문과를 졸업했다면 일종의 수재(!)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 포터로 나섰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얇은 티셔츠 하나에 더러운 청바지를 입고, 겨우 엄지발가락 하나만 끼는 얇은 슬리퍼를 신고, 거의 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짐을 담은 대나무 바구니의 끈을 이마에 두른 채,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대가로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잘 사는 나라에서 온 돈 많은 외국인’인 나에게 달라붙어 막무가내의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녀석이 너무 찐드기처럼 달라붙어 약간은 짜증이 났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가슴 속에서 슬픔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이 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도 못 사는 거야! 이들 앞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1970년대 우리 나라에 와서 천박하게 돈자랑이나 해대며 기생관광을 즐기던 일본인들처럼 보여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녀석이 자신의 주소를 적어 강제로 떠맡기다시피 한 종이조각을 나는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귀국한 이후에 집에 있던 헌옷가지들과 신발들을 몇 개의 라면박스에 챙겨 그곳으로 보냈다. 형편없기로 유명한 네팔의 우편행정 시스템이 일종의 착오(!)를 일으켜 그 물건들이 녀석의 집까지 배달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히말라야를 여러 번 찾았다. 히말라야 트레커들 사이에서 흔히 말하는 이른바 ‘설산병’이 단단히 도진 것이다. 그곳을 찾을 때마다 영혼과 육체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모종의 연민과 야릇한 죄책감 역시 더욱 불거져 갔다. 내가 히말라야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것은 내가 타고난 그릇에 비하여 너무도 버거운 화두였다. 미욱한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고 게으른 나는 화두 자체를 잊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속절없이 세월만 흘려보내던 어느 날, 작지만 아름다운 기적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하여 설립한 설산파들의 기부 클럽

   임현담은 진단방사선과 의사로 위장취업(?) 중인 ‘히말라야의 순례자’이다. <히말라야의 순례자>로 시작하여 <그래서 나는 히말라야에 빠졌다>와 <은빛 설산>을 거쳐 최근의 <히말라야 있거나 없거나>로 이어지는 그의 저서들은 곧바로 길고 아름다운 순례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홈페이지인 ‘히말라야'(www.himal.pe.kr)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히말라야 트레커들이 수시로 들고 나며 정담을 나누는 사랑방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글과 사진으로 가득 차 있고 명상의 향기가 그윽하여 나 역시 매일 드나들 만큼 즐겨 찾는 곳이다.
   2004년 1월 27일, 임현담은 점심시간에 신문을 뒤적이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한다. 녹색연합이 아시아 환경보호운동의 일환으로 ‘녹색아시아를 위한 만원계'(www.greenkorea.org/greenasia)의 조직을 제안했다는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 달에 만원씩 곗돈을 부어 무언가 좋은 일에 쓰자는 것이다. 당시 녹색연합이 제안한 운동들은 멸종 위기에 빠진 러시아 극동표범 보호운동, 필리핀 미군기지촌 주변의 빈민 돕기, 환경오염이 극심한 인도 보팔지역 주민 돕기 등이었다. 임현담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즉석에서 제안한다. 우리도 히말라야 돕기를 위한 만원계를 조직하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가슴 한 켠에 껄쩍지근한 느낌을 안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두 눈이 확 뜨이며 절로 신명이 날 소식이었다. 물론 두 말 없이 양손을 번쩍 들고 찬성을 표했다. 평소 그의 홈페이지를 즐겨 찾던 단골손님들 역시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참여인원이 10명만 넘기면 그 즉시 만원계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 아름다운 음모가 막 무르익어 갈 무렵, 네팔 카트만두에서 김밥집 ‘소풍'(www.hispoem.net)을 운영하고 있는 ‘히말라야의 시인’ 김홍성이 대뜸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 만원계가 히말라야의 특정 지역을 돕기로 한다면 네팔 중서부 안나푸르나 발치에 있는 낭기마을이 적격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아하, 낭기마을!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얼마 전 김홍성이 쓴 장문의 기사(월간 <마운틴> 2002년 8월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감동적인 인물이 있어 맑고 깊은 인상을 남겼던 기사였다. 낭기마을과 그곳에 세워진 산간학교 그리고 마하비르 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도 작다. 위에 언급한 임현담 홈페이지나 녹색연합 만원계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김홍성이 솜씨 좋게 요약한 소개의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 우리는 매달 만원씩의 곗돈을 부어, 마하비르 푼을 통하여, 네팔 히말라야의 낭기마을 주민들과 그들이 세운 학교를 돕기로 했다. 도대체 매달 만원씩을 모아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냐고?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매달 2천 5백원이면 가난해서 학업을 포기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매달 1만 2천원이면 한 학생에게 1년 동안 필요한 교육교재, 음악수업을 위한 악기, 교과서를 제공할 수 있다. 매달 17만원을 모으면 봉급을 못 받고 있는 그곳 학교의 교사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다.
   과연 이런 일에 1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할 것인가? 우리의 근심은 완벽한 기우였다. 일단 만원계를 하기로 하고 그것을 낭기마을 돕기에 쓰기로 결정하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접속할 때마다 계원들의 숫자가 불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이었다(이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독자는 임현담 홈페이지의 ‘나팔꽃통신’ 코너로 들어가 최초의 논의가 시작된 2004년 1월 27일의 글(1492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들을 되짚어 읽어보기 바란다.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는 긍정과 보람의 느낌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네팔 낭기마을 돕기 만원계원의 수는 70명을 넘어섰다. 이 아름다운 기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마하비르 푼이 사업의 우선 순위를 정하여 답신메일을 보내왔다. 첫째,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직업교육원을 짓고 교육자재들을 구입한다. 둘째, 월급을 받지 못하는 마을학교 선생님들에게 월급을 지급한다. 셋째, 마을도서관과 마을회관을 지원한다. 넷째, 마을을 위한 작은 수력발전소를 건립한다. 다섯째, 히말라야의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재활용센터를 건립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프로젝트가 발의되고 실행에 옮겨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우선 절감한 것은 인터넷의 위력이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탄핵정국에 대한 국민의 대응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터넷은 제대로만 사용된다면 더 없이 효율적인 도구요 더 없이 막강한 무기다.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 혹은 참여 네트워크의 무한한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통하여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최초의 발의자이자 계원들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리더 역할을 떠맡게된 임현담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낭기 구루’라고 부른다. ‘구루’란 ‘스승’ 혹은 ‘정신적 지도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은 호칭이다. 하지만 제 그릇을 아는 나는 이런 호칭이 너무 부담스러워 차라리 ‘낭기 사티’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사티’란 친구를 뜻한다. 하지만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우리는 지위나 명예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가슴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인 것뿐이다.
   기부가 남을 돕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 기부는 누구보다도 기부자 자신을 돕는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누구보다도 커다란 기쁨을 얻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히말라야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더욱 커지고 높아졌고, 히말라야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은 약간의 숨쉴 틈을 얻었다. 평생 못된 짓만 해오던 녀석이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면 과장일까? 어찌되었건 한 달에 만원을 내는 것만으로 되돌려 받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대가이다.
   일단 시작한 일이니 남은 평생 동안 계속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루 빨리 이 놈의 생업(그 지겨운 밥벌이!)에서 은퇴하고 나면 낭기마을의 산간학교로 가서 자원봉사자 노릇을 해야되겠다는 결심도 했다. 아무리 천학비재하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작가인데 하다 못해 한국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번개’를 쳐서 만난 계원들 간의 술자리에서 내 생각이 몹시 짧았다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평생 동안 낭기마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기부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특혜’가 될 것이다.  
   우리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일단 정확히 36개월 동안 네팔 낭기마을 돕기 만원계를 지속한다. 그리고 36개월이 다 되어갈 즈음 그 근처로 트레킹(아마도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쯤 될 것이다)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낭기마을에 들러본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또 다른 낭기마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부대상지를 위한 만원계를 다시 시작한다…결국 대상지가 바뀌는 것뿐이지 히말라야를 위한 만원계는 영원히 계속된다. 만약 이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하나의 ‘재단’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 재단의 잠정적 명칭은 아마도 ‘한국히말라야재단’쯤 될 것이다.
   히말라야의 주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있는 인물들 중의 하나가 에드문드 힐러리다. 그가 에베레스트의 초등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 시절의 등반들에는 문제가 많다.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제국주의적 색채를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힐러리는 에베레스트에 오른 직후 현지인들의 시각에서 자신의 행위를 되짚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었다. 현지인들은 그 산에 오를 능력이 없어 못 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산을 성산(聖山)이라고 여겨 숭배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등반행위 자체가 불경죄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
   힐러리는 뛰어난 등반가이기 이전에 겸허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초등기록 자체가 셸파인 텐징 노르가이가 없었다면 아예 불가능했다는 사실마저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초등의 대가로 얻게된 부와 명예의 상당 부분을 히말라야에 되돌려주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의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힐러리재단’이다. 히말라야 오지의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학교(‘힐러리 스쿨’)와 보건소(‘힐러리 하스피탈’)는 그래서 설립된 것이다. 마땅히 존경을 표할만한 품위 있는 행동이었다.
   나는 ‘힐러리재단’을 넘어서는 ‘한국히말라야재단’을 꿈꾼다. 이제 겨우 첫발을 떼어놓았을 뿐인데 너무 황당무계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니냐고 타박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다. 꿈꾸지 않는 삶은 이미 죽은 것이다. 처음 만원계를 발의했을 때 우리는 10명이 안 되면 어찌하나를 걱정했었다. 현재 우리 계원들은 70명을 넘어선다. 그 숫자가 100명이 되고 1000명이 되고 10000명이 되어선 안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마치 광화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모든 길이 어느 사이엔가 촛불을 밝혀 든 애국시민들로 가득 차듯이.
   설사 100명이 안되어도 상관없다. 30명이면 어떻고 10명이면 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이다. 이 작은 프로젝트 하나로 히말라야를 보존하려 한다는 따위의 허튼 소리는 하지 말자. 물방울 하나가 바다를 걱정하는 꼴이다. 히말라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을 해야된다는 따위의 시건방진 소리도 집어치우자. 이런 프로젝트를 통하여 누구보다도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채었겠지만 이 글은 노골적인 캠페인이다. 히말라야의 깊은 산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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