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필리핀 활동가의 투쟁

2006.12.21 | 군기지

미군이 남기고간 기지의 오염으로 인해 고통 받는 필리핀 사람과 땅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는 밀라 발도나도(Myrla Baldonado/여, 53세)의 요즘 형편은 필리핀과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 사람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깊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발도나도씨는 미군기지 정화를 위한 국제연대(Alliance for Bases Clean-up International)와 필리핀 미군기지정화위원회(People’s Task Force of Bases Clean-up)에서 각각 대표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지난 91년, 필리핀 의회는 미군기지가 더 이상 자국내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그 해로 유효 기간이 끝난 ‘미군기지 주둔 조약(U.S. Military Bases Agreement, MBA)’ 연장을 거부했다.
  
  그때 이후 미군기지는 필리핀을 떠났다. 그러나 미군이 고스란히 남기고간 기지내 환경오염은 지금까지도 필리핀 사람들에게 재앙 수준의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월간 <말> 9월호 참고).
  
  발도나도씨는 그 오염이 부른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와 오염물질에 중독된 옛 미군기지내 노동자 등 피해자 구제 활동을 벌이는 한편, 아직도 지독하게 오염된 상태로 버려진 미군기지를 정화하도록 미국과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캠패인을 벌이고 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국가, 미국, 정부 등 거대한 권력에 맞서 약자의 편에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발도나도씨 경우 그것은 필리핀 정치의 보수화와 더불어 ‘목숨을 건 투쟁’이 될지도 모른다.
  
  그 내막을 발도나도씨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미국과 필리핀 정부는 지난 98년, 국민 몰래 ‘방문군 협정(Visiting Force Agreenet)’을 맺었죠. 다시 필리핀에 미군이 (‘방문’이라는 명목으로)들어오게 된거예요. 그런데 그 사이 필리핀 의회에서도 친미적 성향의 의원들이 늘어나 이 협정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미군과 함께 ‘미군 범죄’도 필리핀을 방문했다.
  
  “지난 해 11월 1일, 군사 훈련을 위해 필리핀을 방문한 미군(미항공모함 Essex의 승무원)이 필리핀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군 범죄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것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기소된 미군 범죄였습니다. 방문군 협정에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리할지를 규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미군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요”
  
  하지만 미국과 친미정부(Puppet-governmenet/꼭두각시 정부)의 밀약이 민중들에게 어떤 폐해를 끼치는지 적나라게 보여 주었고, 필리핀 시민단체들이 지대한 관심과 활동을 쏟아 부은 이 사건은 사건 1년이 지나도록 판결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더욱이 방문군 협정비준을 저지시키지 못했던 98년 이후, 필리핀내 운동진영이 힘을 크게 잃었고, 발도나도씨가 몸 담고 있는 미군기지정화위원회도 재정과 인력난의 깊은 수렁에 점차 빠져들고 있다.
  
  “챙겨야할 지역과 피해자, 회원들은 넓고 많은데 재정 문제가 심각해요. 최근엔 그나마 일을 함께 해주던 활동가들도 모두 떠나고 지금 미군기지정화위원회의 활동가라곤 저를 포함하여 거의 둘만 남은 상태입니다. 당장은 미국과 한국 등 해외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아가기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운동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와 함께 또 우려되는 것은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필리핀 정치와 함께 증가하는 진보 인사들에 대한 ‘테러’ 위협이다.
  
  “군인들이 사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총을 쏘아 댑니다. 교회안에 있는 70~80세의 진보적 성향의 성직자를 죽이기도 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필리핀에 두고온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특히 현재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글로리아 마가파갈 아로요 대통령이 2004년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벌였다는 것이 탄로나면서 탄핵 움직임이 크게 일었는데, 아로요 정권이 탄핵 압박을 이겨낸 이후 사복 군인들에 의한 진보인사 테러는 더 늘어났다는게 발도나도씨의 설명이다.
  
  “저희는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필리핀 현 정권과 미국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테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발파란 장군에 대한 처벌 요구를 필리핀 정부는 내내 묵살하고 있습니다. 유럽, 캐나다 등 외국의 단체들도 들고 일어나 성명을 발표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승 부리는 필리핀 극우 군인들의 테러, “그 뒤엔 우리 정부와 미국이…”
  
  특히 미국의 존 네그로폰터 전 주필리핀대사는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던 온두라스에서도 대사를 지냈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우리는 필리핀 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도 이 사태의 이면에 숨어 있다고 짐작합니다. 반대파와 반미파 제거라는 점에서 현 정권과 미국의 이해는 일치하기 때문이죠”
  
  점점 넓어지는 그들의 테러 대상은 왜소한 몸집의 시민단체 활동가 마저 불안케 하고 있다.
  
  “예전에는 신민족주의 동맹(바얀, BAYAN)이 주된 대상이었는데 요즘엔 다른 성격의 정치ㆍ사회 단체들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어요. 군인들은 그들 모두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지난해의 그 미군 범죄 문제로 옛 수빅 미군기지에서 큰 집회를 연 이후, 테러를 자행하는 군부가 우리에 대한 정보도 모으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마르코스 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구속되고 고문 당한 적도 있기 때문에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점차 힘겨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지만, 발도나도씨는 쉽게 운동을 접을 수 없을 듯 했다.
  
  나비와 꽃, 비, 우산, 태양, 구름 등 6세 여자 아이가 그리워 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유서 처럼 그림으로 남기고, 미군기지의 오염 물질에서 얻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크리첼 제인 발렌시아.
  
  태어날 때 부터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나크리첼이 그리워 하던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엘비라 타록(10세).
  
  수빅미군기지의 수은과 석면 구덩이에서 폐암, 간암, 간질환으로 죽어간 125명의 필리핀 노동자들 또한 그렇게 죽고 고통 받던 어린 백혈병 환자 320 명의 부모였다.(이 희생자 수는 지난 10년간, 그들이 감당할 수 있었던 극 소수의 병원과 지역에서만 집계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지금도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죄 없는 필리핀 사람들을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가며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괴물’. 미군기지 환경오염을 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한국을 위한 고언을 잊지 않았다.
  
  “미군은 일단 자기들이 쓰고 버린 기지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요. 그들 스스로 그들이 오염시킨 기지를 정화토록 하지 않으면 한국은 엄청난 댓가를 치를 것입니다.
  
  환경은 결코 안보나 국방 보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예요. 한국이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군은 자기가 오염시킨 기지 절대 책임 안지려 해. 한국은 필리핀 닮지 말아야”
  
  한편 한국과 미국 정부는 지난 7월 13일과 14일에 열린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를 통해서 ‘미군기지 재배치 계획에 따라 한국에 반환되는 기존 미군기지의 횐경오염은 한국이 치유하고 미국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그에 앞서 반환된 15개 미군기지 중 캠프 하우즈의 경우 기름 오염은 한국 토양법상 기준치의 40배 이상, 납과 카드뮴 등 중금속 오염도 2배 이상 초과했다.
  
  전문가들은 다수의 미군기지에서 발견된 토양 유류오염이 “땅을 파면 기름이 고이는 ‘유전’ 수준”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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