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9] 매향리, 무엇이 피어날 것인가

2004.06.10 | 군기지

4월27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 잔뜩 흐리고 찌푸린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대법원의 소음피해 승소확정 판결을 환영하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린 걸 보니 매향리가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매향리는 미군 사격장을 폐쇄하고 재판에서 잇따라 승소해 국가권력의 피해를 받는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이 되었다. 오늘 그 희망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투기꾼들이 벌써부터 몰려온다
매향리 농섬에 위치한 ‘쿠니(KOO-NI) 사격장’의 폐쇄 소식이 알려졌지만 연습탄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대책위원회 건물 옆에는 여전히 미군 폭격기의 사격연습을 알리는 ‘주황색 깃발’이 나붙었다. 길 건너로 화가 임옥상(54)씨가 흩어진 폭탄과 탄피를 모아 만든 높이 6m짜리 조형물 ‘자유의 신 in Korea’가 보였다. 사격장 정문에는 전경 2명이 한가로이 자리를 지켰다. 폐쇄를 앞둔 탓일까? 경계의 눈길을 보일 만한데 여유로워 보였다. 농민들의 출입도 자유로운 듯했다. 대책위를 이끌고 있는 전만규(48) 위원장을 만났다. “비 오는 날에도 폭격을 하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깃발이 올라가면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을 한다는 신호인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고는 날마다 합니다. 요즘도 하루 30∼40대의 A-10기 등이 떠 200회 넘게 사격연습을 하는 것 같아요.” 농섬과 가장 가까운 해안에 도착했다. “퍽퍽퍽.” 둔탁한 폭격음과 함께 멀리 농섬에선 하얀 연기만 피어올랐다. 폭격 전문기로 알려진 A10 폭격기 무리가 충남 당진쪽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바로 매향리 상공을 지나 농섬으로 낮게 날아들었다. 곡예비행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선회하는가 싶더니 연달아 폭탄을 쏟아냈다. 폭격 때문에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농섬은 풀 한 포기 없이 맨살을 드러냈다. 백기를 든 것처럼 보였다. 아름드리 나무로 녹음이 푸르러 ‘짙을 농’ 자를 붙였다는 ‘농섬’은 옛 모양은 잊은 듯했다. 넋을 놓고 한참 농섬을 바라봤다.

필자와 매향리의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에서 새만금까지 걸어서 서해안 갯벌을 순례하던 중 매향리를 알게 됐다. 당시 매향리는 고립무원의 섬이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매향리는 반기지운동과 평화운동의 성지다.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저절로 생겨난 건 아니다. 목숨을 건 16년 동안의 저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8년 6월, 우선 청년들부터 설득했습니다. 오랜 세월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아왔던 이들은 처음 저의 ‘투쟁’ 제안에 반신반의하기도 하고, 경계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집안이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까요. 이들과 함께 주민총회를 열고, 7월에는 마침내 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전 위원장의 회고다. 주민대책위는 경기도·국방부·청와대·사회단체·종교계를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미군 소음 측정을 한 결과 소음도가 국제민간항공기구 규제치를 훨씬 초과하는 평균 90∼110데시벨(dB)로 나왔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주민 피해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버텼고, 정부와 미군에 보낸 진정서에 대한 답변은 늘상 ‘협의 중’이었다. 주민들은 마침내 1988년 12월12일 사격장에 밀고 들어갔다. 대한민국 최초의 미군기지 점거농성이었다. 투쟁은 16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위원장과 대책위 식구들은 1989년과 2002년 두번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폐쇄됐던 육상사격장 터 일부는 농토로 탈바꿈돼 채소농사가 한창이었다. 여름 출하를 앞두고 농부 몇명이 채소인 ‘초록수’를 파종한 뒤 비닐로 덮고 있었다. “새참 먹어야지.” “오는 길에 빵이며 음료수 좀 사가지고 와.” “음료수는 무슨 음료수, 물이면 된다니까.” 영락없는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풍경이다. 올해 처음 이곳에서 1만5천평의 땅을 빌려 채소농사를 짓고 있다는 전귀연(42)씨는 땅에서 나온 탄피 몇개를 보여줬다. 객토에다 퇴비까지 넣었지만 수확이 제대로 될지 걱정이란다. 폐쇄 소식이 반갑지만 부동산 투기꾼들이 벌써부터 몰려오는 것에도 마뜩찮은 표정이다. 추영배(60) 대책위 고문은 “앞으로 매향리가 땅에서는 메뚜기·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고, 바다에서는 조개·바지락을 잡을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 위원장은 사격장이 폐쇄되더라도 “매향리는 상징물로 남겨둬야 한다”며 “반세기 넘도록 포성이 멈추지 않았던 이곳을 자유와 평화, 그리고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장으로 만들기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책위 활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먼저 국방부가 반환 시기로 밝힌 내년 8월 이전에 사격장을 조기 폐쇄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그동안의 환경 파괴와 오염 같은 원상복구 문제도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나라의 사례로 볼 때 기지 폐쇄 이후의 환경 문제로 생길 고통과 부작용의 내용을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위원장은 이를 위해 한-미 당국과 주민대책위,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매향리 원상회복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각계각층에 제안할 계획도 밝혔다.

협의체 구성 각계각층에 제안

매향리 대신 강원도 영월과 홍천·원주에서 다시 군 사격장 터 얘기가 나오는 데 대해 전 위원장은 단호했다. “매향리를 떠난 사격장이 국내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로 이전하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사격장이 미국 본토에 세워지는 것도 우리는 반대합니다. 매향리가 원하는 것은 전쟁과 파괴, 살상이 없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없다면 매향리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우리’가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파괴와 살상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국가권력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 끝에 승리한 지역 주민들. 이제 이곳 매향리를 다시 그 옛날 매화향 흩날리던 동네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평화와 생명이 숨쉬는 공동체로 만들 것인가? 벌써부터 주민들의 움직임이, 활동이 한껏 기대된다.

이글은 한겨레21의 [김타균의 풀뿌리대안운동을 찾아서]에 연재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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