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뿐인 군(軍)소음특별법 안된다.

2011.02.11 | 군기지

전국에서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군사활동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울만큼 심각한 소음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업시간에 전투기가 편대비행을 하면 선생님은 강의를 멈추어야 하고 아이들은 귀를 막고 인상을 찌푸려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들은 얼마나 될까?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찢어질듯한 굉음에 대화가 중단되고 한숨을 쉬어야 하는 일상이 반복된다면 이들이 겪는 고통은 또 얼마나 될까 상상이라도 해 본 정치인들은 몇 명이나 있을까?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가족들이 늘어난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 우리는 상상이라도 해 보았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100여개의 학교와 80개의 병원, 그리고 500개에 가까운 복지 시설이 군비행장과 사격장 때문에 심각한 수준의 군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군소음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국방부의 공식 집계에 잡힌 수치만으로도 69만명에 달한다.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100만명도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인다. 군소음으로 인한 실제 피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전문가 역학조사에 따르면 미군기지 주변에서 거주하는 여성의 불임율이 일반의 경우보다 5-9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사격장 주변 주민들의 자살율이 일반의 그것보다 무려 7배나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울증, 불면증, 청각장애, 과잉행동장애 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피해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지역에서 키우고 있는 가축들의 생육부진과 유산, 그리고 스트레스에 의한 폐사 등 각종 재산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군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할 대책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국가안보를 위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  녹색연합이 2000년부터 나서서 군산 군비행장으로 인한 소음문제를 조사하고 소송을 제기하여 첫 승소판결을 받은 것이 2004년이다. 그리고 대구와 수원 등 많은 곳에서 군소음 피해에 대한 소송이 이어졌고 승소가 잇따랐다. 때문에 일일이 소송을 통해 국가가 보상을 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을 정해 법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일괄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제기 되었고 녹색연합과 국회에서 군소음특별법안을 만들어 상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8조원에 이르는 재정마련을 이유로 번번이 법안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8조원의 예산이 당연히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100만명의 국민들이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만큼 군소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일은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의 이런 태도로 인해 당연히 피해를 받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어 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국방부)가 나서서 군소음특별법을 만들고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2월 임시국회에서 심의를 앞두고 있다. 얼핏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이가 없다. 정부 법안이 그동안 녹색연합과 의원발의로 제안되었던 법안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법안의 핵심이 되는 보상 기준을 터무니없이 약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민간항공기 소음대책 기준이 75웩클(WECPNL : weighted equivalent continuous perceived noise level/국제민간항공기구에서 채택하고 있는 항공기 소음 단위)이고 녹색연합이 국회와 함께 만든 법안도 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에도 정부법안에서는 이를 85웩클로 바꿔버렸다. 이로 인해 보상 금액이 8조원원에서 8천억원 수준으로 10분의 1로 줄어들었고, 피해를 보면서도 구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려 80%나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정해지면 지금과는 달리 향후 소송을 통해서도 75-85웩클 범위의 사람들은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군소음특별법 제정에 적극 찬성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주민들의 피해를 보상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이 반드시 담겨져야 한다. 이미 군소음으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수십년간 고통을 당해오고 있다. 정부에서 껍데기뿐인 법안으로 주민들을 우롱해서는 절대 안된다. 또한 국회에서도 엄격한 법안 심의와 피해주민 및 전문가,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 법으로 인해 이중의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이번 임시국회에서 무리하게 법안을 통과시키지 말고 시간을 갖고 충분히 논의한 후 결정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최승국(녹색연합 사무처장)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