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정의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2010.04.07 | 기후위기대응

– 기후변화 둘러싼 불평등한 현실이 기후정의 운동 만들어

최근 기후정의 운동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기후정의 운동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적인 영향과 피해가 눈에 띄게 부각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기후변화 취약국가의 암울한 미래와 불운이 확실해지면서부터이다.

기후정의 운동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기후변화를 둘러싼 매우 불평등하고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15차 기후변화 총회가 열렸던 당사국 총회에서 가장 큰 구호와 이슈는 역시 ‘기후정의’였다. 온실가스 증가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한다는 것이 기후변화인데, 왜 하필 기후변화에 대해서 ‘정의’의 개념이 들어간 것일까.

기후정의라는 관점은 환경정의라는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환경정의 운동은 1982년에 발생한 미국 워렌카운티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한 기업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14개 카운티(우리로 말하면 군에 해당함) 도로 곳곳에 유독성이 몹시 강한 폴리염화비페닐 3만 1천 갤런 분량을 무단으로 불법 투기 했고, 이를 적발한 주정부는 흑인거주 비율이 높은 낙후지역인 ‘워렌카운티의 쇼코타운십’에 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환경운동에서 환경정의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되었다. 환경정의는 환경으로부터 소외받고 고통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소외받거나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기후정의 운동을 시작한 환경그룹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기후정의를 위한 국제적인 운동의 흐름은 UN 기후변화 협약 6차 당사국 총회인 2000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발했다. 그 자리에 모인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북 아메리카 등에서 온 500여 명의 지역 풀뿌리 지도자들이 UN 기후변화협약 6차 당사국 총회와 동시에 기후정의 1차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기후정의 운동을 주도한 핵심 그룹들은 원주민 환경네트워크, 세계 우림운동, 오일워치 인터내셔널, 지구의 벗과 같은 환경단체들이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UN 기후변화 회의로부터 소외당하는 원주민과 환경 토착민들, 그리고 기후변화로 고통받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소외받는 사람들이었다.

2000년 헤이그에서 출발한 기후정의 운동에 대한 전 세계인의 열망은 해가 갈수록 조직화되고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해가 갈수록 뜻있는 사람과 단체가 모여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13차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에서는 기후정의 네트워크(CJN: Climate Justice Now)가 결성되었다.

기후정의네트워크(CJN)는 기후정의 운동에 동의하고 함께하는 전 세계 환경 네트워크이다. 기후정의네트워크에 속한 조직들은 선진국은 선진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취약국가들을 위한 기후적응 기금이나 펀드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개도국들에게 기술이전이나 적응을 위한 직접적인 피해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UN에 공식 제출하고 있다.

– 온실가스는 부유한 선진국이 배출하고, 피해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기후정의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목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바닷물로 국토가 가라앉고 있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섬나라 국민들, 더러운 물을 마시며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서 매일 16km 이상의 장거리 도보 순례를 가는 아이들, 물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과 살육을 하는 사람들, 사라지는 열대우림과 함께 사라지는 숲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후정의 운동가들은 이들을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왜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누가 그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었나.’

수많은 기후정의운동가들은 그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취약국가 국민들의 삶을 선진국 국민들의 삶과 대비시켰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주요한 이유는 ‘선진 산업국의 경제활동’에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 산업국의 국민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보일러를 태운다. 또 전기를 통해 빛과 열을 만들기 위해 석유를 태운다. 과거에는 누구도 이러한 행동을 도덕적으로 질타하지 않았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석유를 더 많이 태우고 전자제품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특권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스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서는 다량의 온실가스가 배출될 수밖에 없고 온실가스 배출은 현재 기후변화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선진국의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은 가해자가 되었고, 기후 범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여기서 가해자나 범죄자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죄 없고 선량한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인류라는 역사의 과정에서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행동하고 있는 예견된 기후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후변화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는 취약국가들에게 기후변화로 인한 영향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의하면, 기후변화로 인한 세계 자연재해는 지난 20년간 약 200회에서 최근 약 400회로 두 배 이상 늘어났고, 1973년부터 2003년까지 매년 평균 1억 6천만 명 이상이 기후변화로 죽어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당장 매일 2천만명 이상이 가뭄으로 인해 먹을거리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영토 포기선언을 한 투발루 국민들의 생존을 위한 타국으로의 이주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히말라야가 녹고 있는 티베트 고원으로 인해 10억명 가까운 아시아인들이 물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너무나도 불행하게도 이러한 나라들은 대부분은 해결할 재정적 능력이나 기술적 지원이 부족한 기후변화 취약국가군이다. 이들에게 우리는 기후변화 책임을 모두 스스로 감내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들의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리는 너무 안락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 너무나 불평등한 상황,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때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선진국 국민들이 무방비 상태로 배출해오고 있는 온실가스가 국경없는 대기 중으로 날아가 보이지 않는 망치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너무나 불평등하게도 가난하고 열역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 피해가 우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기후변화 취약국가의 사람들은 기후변화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온실가스라는 용어를 접하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이 일으키지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고통을 그들은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후변화 영향으로부터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기후난민’ 이자 ‘기후 피해자’ 들로 후대에 기록될 것이다. 그럼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녹색연합 기후에너지국 손형진

*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기재한 글입니다.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