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녹색이다

2010.04.07 | 환경일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방향을 갖고 움직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20여년 녹색운동의 발자취를 역사로서 기록하는 것은 단순하게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다. 현재 녹색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를 바라보는 성찰과 즐거움이 있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환경운동은 소위 낯선 것이었고 배부른 사람들의 한가로운 타령이었다. 공단 등의 공해발생지역에서 주민이나 노동자들이 입는 온산병과 같은 공해병 피해가 수출주도 경제성장 대가로 심각하게 드러나고, 이를 알리고 구제하는 공해추방운동이 지역에 국한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이른바 먹고 사는 문제인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시대에 공해문제는 성장의 양면으로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여졌고, 자연이나 생명을 논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87년 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나라와 지역의 살림 및 생활문제에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는 이른바 시민의식이 싹트고,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90년대를 전후해서 발생하기 시작한 수돗물 파동은 기존의 공해추방운동을 환경운동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역사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89년 수돗물 중금속 파동, 90년 수돗물 트리할로메탄 발암물질 파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나면서 비로소 안전한 물과 공기를 누릴 환경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91년 연이어 발생한 낙동강페놀오염사건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환경운동은 시민운동의 대명사처럼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였다.

‘수돗물을 안심하고 마실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해?’
지역에 사시는 아주머니들로부터 들어오는 뜨거운 민원이었다. 삼양동, 상계동 등 강북지역에서 아파트 재개발이 일어나 원주민이 내몰리기 시작할 무렵, 주민의 권익의식을 높이고 어려운 이웃, 불우한 청소년과 동고동락하기 위해 지역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동네의 가난하고 힘없는 아주머니들이 그동안 자연의 권리처럼 마셔 온 물을 마실 수 없다는 뉴스에 가족의 건강, 밥상, 돈 걱정으로 발끈할 때 나는 그 민원에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수기라는 것이 등장하고, 미군들만 먹는다던 생수가 불법으로 팔리고 있었지만 부유한 사람들이나 누릴 대증요법에 불과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나선 것이 90년 초 나의 환경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물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단체나 기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주민과 함께 진로 주정공장 설립을 반대하며 영산강을 호남 주민의 식수원으로 살리고 있는 목포의 서한태박사를 찾아뵙기도 하였다. 운동경험도 없던 의학박사가 ‘영산호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안 해 본 것이 없다’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소중한 대중운동 경험을 나누어 주셨다. 목포 서울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오면서 마음은 벌써 새로운 환경단체를 만드는 길로 성큼 내딛고 있었다. 특정 계급, 계층에 국한하지 않고, 지역과 국경을 넘어서는 생명의 문제, 평화의 문제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올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길을 나서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녹색이다”
독일 녹색당 창당의 주역으로 생명운동, 반핵평화운동에 열정을 바친 페트라켈리의 말이다. 그 당시 새로운 환경운동을 모색하며 만난 수많은 인연 중에 일면식도 없는 녹색당과 페트라켈리에 가장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분이 송순창 선생으로 89년부터 대한녹색당창당준비위원회를 추진해 온 분이다. 페트라켈리 초청으로 녹색당을 방문한 송선생에게 녹색당 정강정책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래! 우리가 만들 오늘, 미래는 녹색이다!’ 환희와 설렘이 가득했다. 한국의 정치나 운동이 지나치게 이념화되고 이데올로기로 구조화되어 좌우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양성과 대안을 찾을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 ‘녹색’이 얼마나 멋지던지!

인간만을 위한 개발 탐욕을 넘어서 모든 생명에의 경외감을 갖는 ‘생명존중’, 모든 국민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물, 공기를 지키는 ‘환경보호’, 핵무기를 포함한 무기경쟁과 전쟁을 그만두고, 약탈과 착취를 위한 폭력을 제거하여 모두가 형평하게 나누며 사는 ‘평화사랑’을 푸른 지구, 푸른 한반도에서 실현하는 꿈을 갖고 ‘푸른한반도되찾기시민의모임’을 91년 창립하였다. 평범한 시민 100여명이 참여하여 주말마다 환경캠페인을 벌이고, 퇴근 후에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생활현장부터 변화를 일구었다. 같은 시기 대전대 장원박사는 전문가들과 함께 배달환경연구소를 만들어 새로운 환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가 추구한 ‘재미있는 환경운동’ ‘대안 있는 환경운동’ ‘아름다운 환경운동’ ‘생활 속 환경운동’ ‘함께 하는 환경운동’은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넘쳐 마음에 쏘옥 들어왔다. 환경강좌에 장원박사를 초청, 강의를 들으며 속내를 털어 놓아보니 역시 통하는 것이 많고 그의 운동 비전이 심오하였다. 생명, 평화, 환경을 담는 녹색운동으로 거듭나자며 의기투합하고, 송순창 선생까지 결합하여 94년 우리는 ‘배달녹색연합’을 재창립 하며 비로소 ‘녹색’을 천명하였다. 녹색이 천명되기까지 우리는 송순창 선생의 수유리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자주 만나 굵은 소금에 구운 목살과 소주를 꽤나 먹어치웠다. 채식을 한지 10년이 넘어가지만 그 때 그 소금구이 맛은 녹색운동의 열정을 불태우며 만났던 벗들과 함께 잊을 수가 없다. 청년의 순수함과 열정으로 자란 푸른한반도, 새처럼 날아갈 목표를 직시하고 멀리 날아 그 곳에 다다르는, 자연의 에너지와 지혜를 가진, 새를 좋아하는 송순창 선생, 탁월한 독창성과 추진력으로 녹색운동을 진일보시킨 장원박사. 모두 간디선생이 ‘평화로 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평화가 길이다’고 한 것처럼 ‘녹색’의 길을 함께 걸었다.

글 : 김제남 (녹색연합 정책위원장)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