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 생명의 자리를 꿈꾸다

2010.05.04 | 행사/교육/공지

제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는 겨울의 끝자락에 시린 강바람을 껴안고 북상중인 기러기의 날갯짓이 힘겨워 보입니다. 그래도 겨울이 저 떠나는 자리에 들어와 앉을 인연이 있는지는 아는가봅니다. 소리 없이 녹은 땅 위에 고운 햇살 한 줌씩을 놓아주고 있습니다. 꽃잎들이 움틀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요, 떠나는 것의 아쉬움은 부족함에 대한 연민이고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미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시작될 새로움을 위한 희생이고, 밑거름이며 이어지는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새 봄, 빛, 꽃, ……, 생성 입니다.

이렇듯, 꽃은 어렵게 세상을 만나 향기를 날립니다. 언젠가 제 떠남의 아쉬움이 크기 전에 만나야 할 인연들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아직 겨울잠으로 웅크려 있겠지만 역시 제 들 자리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을 나비며 무당벌레, 벌을 만날 기대를 가지고…….

가벼운 봄바람이 살랑대는 날, 고운 햇살 든 골목 구석구석에서 애써 고개를 내밀고 있는 꽃들을 봅니다.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하지만 녀석들의 낯빛이 그리 밝아 뵈지는 않습니다. 함께 하거나 찾아와 줄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도심 속에서의 봄을 지켜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미안한 발걸음을 돌려 더 너른 봄 냄새를 맡아 보려 근처의 근린공원으로 가 봅니다. 입구부터 콘크리트로 포장된 바닥과 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너무 깔끔하고, 지금쯤 나무 밑, 흙 위로 자라고 있어야 할 풀잎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길어진 추위 탓도 있겠지만 벌써 봄맞이 도심 조경관리 때문에 사람들의 손길이 지나가고 있는 탓입니다. 이제 더욱 호미의 갈퀴질이 거세지며 잡초 제거제가 뿌려질 것입니다. 도심 곳곳에도 인공으로 키워진 작고 예쁜 조경화가 수놓아 지겠지만, 그 곳 역시 풀들이 자랄 여유는 없습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침엽수들은 여전히 당당하지만, 머리만 보일뿐 제 몸뚱이의 가지들은 없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 자리에서 제 싹이 돋아나 자라겠지만, 다시 잘려 나가는 아픔을 반복해야 합니다. 드문드문 유실수들이 제 싹을 키워 내느라 애쓰고 있지만 그네들 역시 힘에 부친 모습입니다. 언젠가는 인간들이 즐길 자리와 쉴 자리를 위해 뽑혀 나갈지도 모릅니다. 풀숲은 아예 자리 잡을 터가 없습니다.

박제되어 버린 숲 속에 지금 자신들이 날 자리를 꿈꾸며 기지개를 켜고 있을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꿈도 언젠가는 뒤이어 무차별하게 살포될 살충제로 인하여 산산이 깨질지 모릅니다. 흙과 나무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이 지금 우리 인간들의 손에 저당 잡혀 있습니다. 봄은 왔고, 꽃들은 나름의 모습으로 피어나 향기를 내뿜고 있지만, 그 존재를 확인 시켜줄 나비며 곤충들의 날갯짓이 위태롭습니다. 봄을 맞으러 숲에 든 내가 무거운 봄의 침묵 때문에 꼼짝을 못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공원 관리사무소에 들러 나름의 환경적 소견을 펼치며 공원 관리에 대한 대안적 방법들을 토해냈습니다. 관리자의 다짐은 받았지만 여전히 발걸음은 무겁습니다.

다시 외로운 골목 봄꽃들을 마주치며 미안해하다 집 대문을 열었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햇살 한 줌 속으로 화단 한편에 소리 없이 돋아난 풀 잎 싹을 봅니다. 겨우 내 콘크리트 벽 아래 꽁꽁 언 채 품고 있던 희망을 터트린 녀석, 주위에 드문드문 친구들이 함께 자라나며 웃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풀잎들이 희망을 터트려 커 가기를. 더불어 그 자리에 들어올 수많은 곤충들을 맞아, 키워 주고 또 날려주기를. 그렇게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가, 새벽의 맑은 이슬 한 방울 맺고 잠들어 있을 꽃잎 하나에 앉아서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수많은 곤충들과 풀잎들이 내려앉는 꿈을 꿉니다. 이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작아지고 낮아져야겠습니다. 숨소리를 낮춰야겠습니다. 내가 하루 종일 하릴없이 봄의 길목에서 애써 분위기 잡으며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무한자연의 무한생성을 위한 한걸음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이 봄에는 빈자리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풀이며, 꽃이며, 나무들을 심어봐야겠습니다. 녀석들의 친구들이 쉼 없이 찾아들 수 있도록, 맑은 골목길 활짝 열어 놓은 채로……

글 : 정미경 (녹색연합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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