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서 대안생리대 만들기 – “소피. 닙. 닙. 닙…”

2010.09.07 | 행사/교육/공지

이게 무슨 암호같은 말?
소피?
소피라면 소피 마르소의 그 소피인가?

활동가들의 재충전을 위해 마련된 단비기금. 해마다 활동가들이 팀을 만들어 계획서를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비용을 지원해주는 제도다. 엄마 활동가 세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라오스에서 여유를 찾겠다 라는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했고, 다행히 올해는 쟁쟁한 경쟁자가 없어서인지, ‘일하는 엄마들’이라는 이유로 동정표를 얻은 탓이었는지, 우리에게 단비기금이 수여되었다.
라오스로 가자는 계획만 있지, 바쁜 날들 때문에, 가서 뭘하고 뭘 볼지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은채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다 우연히 아시아엔지오센터에 있던 한 연수생이 필리핀에서 주민들과 대안생리대 만들기를 했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글을 읽고 나선, 아, 우리도 이거 하자, 하고 갑자기 결정하게 되었다. 라오스에 가서 그 아름다운 풍광과 ‘벼가 익는 소리를 듣는다는’ 라오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그래도 뭔가를 나누고 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현지 말도 모르는 우리가 나눌 거라는 게 뭐라도 있겠냐 말이다. 그러다 대안생리대 글을 읽으니, 다른 건 몰라도 우리라면 이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생리대 만큼은 만국 여성들의 공통 관심사에다, 공통의 문제거리고, 게다가 물자가 넉넉하지 않고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해 쓰고, 아직 환경호르몬이니 플라스틱제품의 환경오염 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지 않은 나라에서 수입해오는 일회용 생리대의 위험에 대한 정보를 알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행히 라오스에서 국제협력단 활동을 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도 낸 영란씨에게 도움을 청하니, 꼭 필요한 일일 거라며 격려도 해 주고, 대안생리대 만들기를 함께 해 줄수 있는 그룹과 다리도 놓아주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지에선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융천도 넉넉히 구입하고, 똑딱이 단추며 바늘, 생리대 본 같은 것도 준비했다. 트렁크의 반을 차지하는 이 물품들을 끌어안고 라오스에 도착한 첫날, 영란씨에게 소개받은 루앙파방에 국제협력단으로 와 계신 정칠 선생님과 연락을 취했다. 정칠 선생님께서 다시 루앙파방의 College of Health & Science의 교장선생님과 연결해 주신 덕분에 간호전문대학 격의 학생들과 대안생리대 만들기 워크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루앙파방의 청소년 단체인 CCC에 무작정 들러 스텝들에게도 대안생리대를 설명하고 여자아이들 20여 명과 함께 또 한번의 워크샵을 하기로 했다.





▲ 설명을 좇아가며, 옆 친구를 살펴가며 만들어보기, 남학생들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들어와 설명서를 읽어본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영어로 의사소통하기가 쉽지 않을거라고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영어설명서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라오스어로 대안생리대의 필요성과 만드는 법을 담은 페이퍼를 만들기로 했다. 이 일은 루앙파방 슈파누봉 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님으로 와 계신 김재명 교수님과 선생님의 한국어 수제자 쌩훙 디반나, 쑴받 폼마니의 도움으로 진행되었다. 결혼도 안 하신 김재명 교수님과 젊은 라오스 남녀를 앉혀놓고 생리대 운운하느라 서로 얼굴을 붉히며 진땀을 빼야 했다^^ 한국어를 대충 알아듣는 친구들이지만, 왜 일회용 생리대가 문제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개념들, 쓰레기, 플라스틱 같은 단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다시 설명하기 위해 김재명 선생님과 학생들이 토론해가며 한 장 짜리 라오스어로 된 대안생리대 만들기 설명서가 완성되었다.  

젊은이들에게 물으니 라오스에선 생리대를 일컫는 말이 따로 없다고 했다. 다들 생리대 제품인 ‘소피’라고 부른단다. 우리가 오래전에 생리대를 통칭해 제품의 이름인 ‘프리덤’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다. 아마도 분명히 단어가 있을텐데, 젊은이들에겐 그 단어대신 일종의 은어처럼 그냥 소피라고 부르는 것 같다. 사실 생리나 생리대 같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게 된 건 우리에게도 최근의 일이니 놀랄 일이 아니다.

우여곡절끝엔, 그리고 내내 우리가 이 워크샵을 하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인가를 계속 되뇌이며 계절학기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에 모인 50여명의 여학생들과 생리대 만들기를 시작했다. 라오스어로 된 설명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설명을 하기 위해 동행한 경숙 선배가 영어로 진행을 하고 영어를 잘 하시는 선생님 한분(이분도 남자!)과 남학생 한 명이 통역을 해 주고, 나와 근정씨가 보조로 진행하며 그렇게 워크샵은 시작되었다.





▲ 만들기가 시작되자, 다들 너무 진지해졌다. 믿샘과 닙을 반복하며 모둠마다 돌다다니며 설명을 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여자이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아는 생리대 ‘소피’가 실은 건강에도 환경에도 이롭지 않다는 것, 면생리대의 장점과 또 불편한 점들을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국에선 다 이런 것을 사용하는가, 양이 많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나, 새지는 않는지 등등 한국에서도 면생리대 만들기를 할 때마다 이야기하게 되는 것들이다. 특히나 이 학생들은 간호원이 될 친구들이다. 시내에 살고 있어서 소피를 사고 쓰기에 그닥 불편한 점이 없을 지라도, 혹시 나중에 시골마을에 들어가 일하게 되거나, 아직은 어리지만 소피를 계속 사용하면서 생기는 문제점, 여성들의 자궁 질환 등을 깨닫게 된다면 언젠가 한국인들과 함께 만들었던 면생리대를 대안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 보았다. 설명은 어려웠지만, 만들기는 쉽게 진행되었다. 바느질을 뜻하는 라오말 ‘닙’ 가위를 뜻하는 ‘믿샘’ 두 개의 라오말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다 만들어진 생리대를 들고 자랑하고 옆 친구를 도와주고 수다떨면서 그렇게 면생리대 만들기가 마무리되었다. 수업시간에 쫓겨난 남학생들도 창문에 모여 앉아 여학생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흥미진진해 했다.

오후에는 10대 초중반의 친구들과 워크샵을 진행했다. 방학중이고 비가 오는 날인데도 센터에는 20여명의 어린 친구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중 생리를 하는 친구가 반,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반이었다. 소피라는 말에 키득키득 웃음부터 터져나오는어린 친구들이었지만 센터에서 하는 여러 문화활동으로 가위질이나 바느질에 익숙한 친구들이라 오전의 큰 언니들보다도 더 잘 따라왔다.

필리핀에서 면생리대만들기를 했던 분의 글에는 현지 여성들이 그날이 되면 밖에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요강 같은 데 하루종일 앉아있기만 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영란씨는 라오스에서 일회용 생리대를 빨아 말려서 쓰는 이도 보았다고 했다. 더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선 나뭇잎이나 누더기, 천조각, 진흙같은 걸로 대신한다고 한다. 진흙이 어떻게 생리대를 대신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안전하고 위생적인 생리대를 구하지 못해 그날이 되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여성들이 개발도상국에는 흔하다고 한다. 그래서 섬유를 만들 수 있는 현지의 재료를 이용해 생리대를 만드는 캠페인을 펼치는 그룹도 있다.
(관련 글 http://slowalk.tistory.com/434)





▲ 완성된 나만의 생리대

진행을 도와주던 CCC의 선생님은 예전엔 라오에서도 이런 생리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좋은 습관이 어느 순간 단절되면서, 돈이 없으면 사서 쓸수 없고, 사서 쓴다하더라도 좋을 게 하나 없는 공산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라오스엔 아직 공산품이 닿지 않는 산골마을, 전통모습을 간직하며 산 속에 소수민족들이 많다. 다행히 직물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흔하고, 수공예품들도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소피가 빠르게 보급되기보다는 좋은 전통을 되살리는 방법을 택하는 쪽이 여러모로 이로울텐데, 이날 우리와 워크샵을 한 친구들이 그 씨앗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보았다.  

글 : 정명희 (녹색연합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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