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생, 귀하다, 만나자

2011.01.07 | 행사/교육/공지

한가한 12월의 짧은 낮, 점심 먹고 막 상을 치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 같았지만 안경을 쓰지 않으면 숫자가 잘 안 보이는 나이가 되어 아무 전화나 다 덥석 받는 터였다. ‘원이니? 나 종수야.’ 하는 말로 시작된 동창과의 통화는 그날 하루를 완전히 두통 속에서 보내게 만들었다.

5년 전, 동창회에 가서 졸업 후 처음 종수를 보았었다. 과에 다섯 밖에 없었던 여학생들과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이었던 종수가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해 있어서 반가웠었다. 그런데 웬일로 내게 전화를 했을까? 연말이 됐으니 우리 학번끼리 한 번 만나자 내가 쏠게, 로 시작해서 여학생들과는 자주 만나는지, 아이들은 다 장성했는지까지. 내 대답은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었다. 속으로 아, 종수가 성공해서 동창들 앞에서 폼 잡고 싶은 거구나. 아니면 무슨 선거가 있나? 대꾸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왜 전화를 했을지 머릿속이 바빠지고 있었다. 빠른 말투가 얼핏 비슷하면서도 목소리가 달리 들린다고 하니 뭐 통화한 적이 없었고 세월 탓이지 않겠냐고 한다. 게다가 학창시절에는 재수한 여대생들이 더 많아 서로 존대어를 썼었는데 반말로 말끝마다 원아, 원아를 연발하니, 얘가 왜 이러나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너는 요즘 뭐하는데?’ 하고 반말로 묻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도 못 해본 <남녀반말>을, 세월을 빙자하여 모르는 척 시도해 본 몇 분 안 되는 시간이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부끄럽고 찝찝하다.

– 중국 왔다 갔다 해. 근데 넌 애들 결혼시킬 때 됐겠다, 다 컸지?
– 응, 큰 아인 서른, 그 아래로 여섯 살 터울로 둘 더 있어. 넌?
– 응, 근데 우리 딸이 말이야, 이번에 취직했거든, 내가 언제 한 번 인사시킬게.

이 대목에서 나다운 ‘통 큰’ 착각을 했다, 아하, 우리 큰 아들을 탐내는 건가? 혹 사돈을 맺자는? 그런데 울 큰 아들 백수인데 어쩌나. 그런데, 아니었다.

– 걔가 ‘***경제’에 취직했는데 말이야, 부탁이 있어, 이거 일 년만 좀 봐 줘야겠어. 내가 맛있는 밥 살게. 어렵게 취직했는데, 글쎄 이렇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

어쩌지? 동창 딸이 요즘 같은 세상에 직장을 구했는데 도와줘야지, 경제지를 보면 나 같은 경제잼병도 재테크를 잘 하게 되려나?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친근한 말투로 맛있는 밥을 서너 번도 더 미끼로 던지며 내 입에서 주소를 쉽사리 받아 챙겼다. 근데, 얘가 좀 많이 변했네, 이렇게 뻔뻔하지는 않았는데. 딸은 핑계고 이게 혹시 자기 일이 아닐까? 오죽하면 여자 동창한테까지 전화를 다 했을까. 종수든, 종수 딸이든 힘든 세상, 자칫 상처 입을라. 밖에서 삼겹살 먹을 거, 고기 사와서 집에서 몇 번 구워 먹으면 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는 그 밥 얻어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걸 ‘확실히’ 밝혀둔다.

좀 복잡한 심경으로 통화를 마치고 동창 은경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좀 전에 종수 전화를 받았단다. 종수가 많이 변했다고, 제비족 같아졌다고 했더니,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걸 감추려고 그렇게 말투가 된 게 아니겠냐고 반문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2년 전에도 잡지 구독해 달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서 그 말을 하니까, 그 때는 자기 아들이었고 이번에는 딸이라고 하더란다.

뭐야, 이거 좀 이상하다. 내 둔한 센서에도 빨간 불이 들어왔다. 같은 학번 연락책을 맡은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종수가 요즘 뭘 하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한참 만에 답이 왔다. 지방에 사는 한 동창도 그 전화를 받았다는데, 한 달 전에 종수와 통화했었기에 금방 그가 종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당신 종수 아니지? 하니까 끊어버렸고 그 번호로 전화를 해도 안 받더라는 말. 진짜 종수는 중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어쨌든 추억의 종수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는 생각은 잠시, 이게 진정한 다행일까? 불쌍한 ‘그 종수’는 그런 전화를 걸면서 몇 번의 위기와 몇 번의 ‘성공’을 낚았을까. 산천이 병들고 있으니 사람도 병들고 있는데 (아니, 그 반대인가?) 뭐가 다행이란 말이지? 내 머리 속에서는 추억 속의 종수와 전화 속의 종수가 명예훼손을 놓고 시비가 붙었는지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쪼록 두 종수와 더불어 뭇 중생들, 수상한 한반도에서 긴 겨울잠 자고 눈 번쩍 뜨면 광명천지 새 세상이 와 있었으면 좋겠다. 수상한 말세, 끝없는 이 말세에.

글 : 이원 (녹색연합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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