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산 생태기행 후기] 얼레지 군락을 만나다

2004.04.06 | 행사/교육/공지

수레바퀴 밑에서
고속철이 4월 1일부터 일부 개통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언론에서는 고속철 시대의 사람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반나절 생활권이 되어 사람의 삶은 편리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며, 물량 수송에 획기적이 전환을 가져와 경제에 막대한 이익을 초래해 국가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잦은 고장으로 명성에 금이 가진 했지만 여전히 과학과 합리의 쌍두마차는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도로 미래를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레바퀴 밑에 깔린 생명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을 지고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수레바퀴가 몰고 간 미래의 삶은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도롱뇽의 삶도 얼레지의 삶도 그리고 사람의 삶도, 자칫 <수레바퀴 밑에서>의 주인공 한서처럼 자연과의 교감을 잃어버리고 도시 기계의 일부분으로 살다가 허망하게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무제치늪으로 가다


식목일을 이틀 앞둔 봄날,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이 천성산을 찾았습니다. 서울에서 고속철로 세 시간이면 간다는 부산을 여섯 시간 정도 걸려 내려갔습니다. 녹색연합 회원도 있고,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회원도 있고 그리고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시민과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발아래 함께 있어야할 자연의 숨결을 멀리 멀리 찾아다녀야 하는 어른들이나, 어머니의 손을 의지해야 하는 아이들은 애달픕니다. 나무 심는 날을 만들면서 또 다른 곳에서는 나무를 베어 넘어트리는 불합리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한 일입니다.



하룻밤을 불편한 숙소에서 보내고, ‘천성산생태기행단’은 삼덕공원묘지를 지나 정족산 아래에 있는 무제치늪으로 향했습니다. 봄풀이 올라오는 소리가 어른어른 거렸습니다. 정족산은 700몇 미터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산입니다. 쉼 없이 달려 내려오고 있던 백두대간이 1200여 미터의 가지산을 넘고 한숨 돌리며 물 한 모금 마시듯이 쉬고 있는, 아마도 그래서 정족산에서부터 천성산을 지나 원효산까지 산중에 늪이 있나봅니다. 마치 오아시스처럼. “늪에 한번 빠지면 가슴까지 들어가서 죽을 수도 있다”라며 잔뜩 겁을 준 공원 관리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른 억새가 누워있는 늪으로 누구도 감히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군데군데 밟지 못할 생명이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공간에 불과해보이지만, 그것에 애정을 가지고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하면 그 안에 있는 생명들과 그것을 품고 있는 늪의 크고 높은 가치가 보일 것입니다” 라고 말한 지율스님이 말씀과 생태기행단의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얼레지 군락에 발목을 잡히다


무제치늪을 지나 정족산을 옆으로 두고 낙동정맥 마루금을 걸었습니다. 천성산과 원효산이 멀리 보이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불에 탄 화엄벌이 보일 듯 말듯 누워있었습니다. 그 곳까지의 마루금은 세상을 가름하지 않겠다는 듯 모나지 않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세상 도처의 길이었습니다.  

마루금에서 내려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안적암 근처에서 얼레지 군락을 만났습니다. 한길 얼레지 밭에 매여 도무지 마저 내려가지를 못했습니다. 길 떠나는 남정네의 바짓단을 잡고 있는 여인네의 손길처럼 고옥한 유혹이 시려있던 얼레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제 격정으로 바람을 만들어 흔들고 있었습니다. 얼레지의 유혹을 간신히 뿌리치고 내쳐 달려 내려왔으나 뒤이어 나타난 현호색의 바다는 한길 낭떠러지였습니다. 생태기행단의 비취색 마음은 수로부인을 위해 낭떠러지의 꽃을 꺾어 바친 노인의 마음처럼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조계암에서 지율스님을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계곡으로 마저 내려갔습니다. 지율스님과 함께 걷는 길은 더디고 느긋했습니다. 계곡은 아찔하게 굽이쳐 내려가고 있었고, 피나물, 꿩의 바람, 노랑제비, 꽃다지 들은 연기처럼 울긋불긋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막 깨어난 올챙이들이 바글바글 소란을 피우고 있었고 미처 깨지 못한 도롱뇽의 알들은 속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늘 그대로 자연입니다.




복사꽃이 한참 피어나고 있던 계곡의 끄트머리에서 임도 위에서 지율스님은 다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곡에는 수달도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계곡을 12개나 품고 있는 천성산을 뚫고 지나가겠다고 하고 있어요. 이러한 자연에 들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없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양산시에서 수달이 살고 있는 이 계곡과 다른 두 개의 계곡을 지나가는 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이미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땅 주인인 내원사 주지와의 협의도 없이, 지역주민들과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책상에 앉아 줄을 죽 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천성산과 부안과 새만금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궁금합니다. 대규모 국책사업의 졸속진행 교훈을 어디에 파묻어 버렸는지 궁금합니다.  

천성산은 그대로 자연이다
천성산을 이야기하면 흔히 고속철과 지율스님을 이야기 하곤 합니다. 하긴 지금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성산에서 고속철과 지율스님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을 우리는 미안해해야 합니다. 무제치늪과 화엄벌에 살고 있는 생명들, 도롱뇽과 얼레지와 현호색과 꽃다지들에게 말이죠.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미래를 우리가 함부로 설계해도 되는지 말입니다. 자연은 그대로 자연입니다. 그곳에 미래가 있습니다.

도롱뇽의 미래도 사람의 미래도 그곳에 있습니다. 고속철이 당겨온 미래에도 자연이 온전히 살아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나, 그러나 벌써부터 자연은 고속철의 바퀴에 밟혀 짓눌리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을 때라야 가장 행복함을 느낍니다. 천성산을 오르던 생태기행단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부디 그 행복이 오래 오래 간직되길 바랍니다.  




지율스님과 거지성자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든지 그것이 이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율스님이 고속철 원효터널 개곡리 벌목 현장의 농성장을 잠시 나왔다. 서울에서 먼 길 온 도롱뇽의 친구들과 조계암에서 점심도 먹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봄꽃들을 구경했다. 스님은 “천성산의 계곡은 산지의 늪이 주는 자연의 축복”이라며 곳곳의 비경을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천성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올라간 금봉암에서 암자 주지스님과의 인연으로 올라와 있던 ‘거지성자’라고 불리는 독일인 페터 노이야르를 만났다.

지율스님은 고속철의 천성산 구간 공사의 부당함을 이야기 했고, 그는 한국에는 고속철이 필요 없다는 말을 했다. 뛰어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이 왜 경제성장에 열을 올리며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 시간을 내 지율스님이 농성하는 현장을 꼭 방문하겠다고 했다. 양말을 신지 않고 한 겨울에도 샌들만 신고 다니는 그의 발과 지난 삼보일배 때 지율스님 발은 서로 닮아 보였다.



신발 없이 버선발로 진행한 지난 삼보일배 사진이 표지로 쓰인 지율스님의 책이 얼마 전에 나왔다. <지율, 숲에서 나오다>는 천성산 보존을 위해 일하며 썼던 글들과 사진들이 모아져 있다.

글 : 작은것이 아름답다 최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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