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소비하는가

2019.01.21 | 행사/교육/공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 1987년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 Barbara Kruger의 포스터에 등장한 선언 이후로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에서 ‘소비하는 인간’으로 재규정되었다.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 대통령의 첫마디가 “이제 안전하니 어서 다시 쇼핑하라”는 말이었다고 하니 ‘호모 콘수무스 homo consumus’가 새로운 시대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결핍을 손쉽게 충족하려는 ‘소비주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끝도 없이 먹고 입고 마셔야 한다. 수렵 채집경제 시대였다면 나와 가족의 노동력으로 이러한 재화들을 직접 수급했겠지만, 화폐가 매개하는 ‘분업화된 생산 및 유통의 거대한 시스템’에 사는 우리들은 필요를 직접 모두 스스로 챙기지 않고 타인과 교환하고 거래한다. 내가 먹을 쌀을 직접 생산하기보다, 그 쌀을 살 수 있는 돈을 벌어야 하는 ‘게임의 법칙’에 자의든 타의든 동참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생계의 필요를 충족하고 살기 위해서라면, 돈이 없을 땐 내가 직접 내 식량을 재배해서 먹고 살아도 된다. 그러나 노트북이나 아이폰, 대학 학위나 의료 서비스 등은 내가 생산할 수 없다. 문명화된 삶의 필요는 문명의 법칙대로 충족해야 한다. 돈이 아니면 그것을 얻을 수 없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우리는 절실해진다. 대학 학위나 노트북이 없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왜 필요하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는 빵이 ‘필요’지만, 또 다른 누구에겐 아이폰이 ‘필요’다.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지만, 실상 자신의 소비를 들여다보노라면 필요와 욕망은 그리 쉽사리 구분 짓기가 어렵다. 어쩌면 모든 필요에는 이미 욕망이 묻어있는지도 모른다. 출퇴근용 자전거는 필요 소비일지 모르지만, 그 자전거가 500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제품이어야 한다면 어떤가. 그냥 ‘쌀’과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의 가격 차이는 필요의 차이인가, 욕망의 차이인가. 이처럼 현대의 소비는 단순한 필요 충족 메커니즘 그 이상이다.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그 이상을 원한다. 먹고 돌아서면 또다시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어야 하듯, 삶의 과정 내내 징하도록 반복되는 허기는 계속 충족하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근원적 결핍감에 대한 충족의 과정이 바로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행복이란 ‘만족’에 있다고 한다. ‘만족’하는 순간 인간은 무언가를 더 갈구하지 않고 채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소비의 중단을 의미한다. 반대로 보자면 사람들은 ‘허기’를 계속 느껴야만 지속해서 무언가를 추구하려 할 것이다.

결핍을 느낀 뇌가 뉴런을 통해 이를 충족하려는 신호를 보낼 때, 다양한 경로로 신호가 전달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결핍을 충족시킨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중 가장 효과적으로 이를 충족시켜 쾌감을 주는 방법을 발견하고 여기에 너무 집중하여 ‘뉴런 고속도로’를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빠르게 효과적으로 결핍을 해결할 수는 있지만, 다른 뉴런들이 기능하지 않게 되어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독’ 현상이다.

우리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결핍감을 해소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낄 때 좋은 사람을 만나서 해소하거나,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귀여운 물건을 살 수 있다. 좋은 사람보다 반려동물이, 반려동물보다 술이, 귀여운 물건이 좀 더 구하기 쉽고 빠르다. 좋은 사람과 반려동물에는 나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술과 물건은 큰 노력 없이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술과 물건이 외로움을 해소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안정적인 애착에의 욕망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소중한 가치임이 분명하지만, 이는 매우 오래 걸리기도 하고 어렵다는 것도 우린 잘 알고 있다.

결핍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소비’에만 의존하는 ‘소비중독’에 걸려 있지만, 불행하게도 결핍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소비중독’은 그러한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돈’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지게 된다. 돈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불안감이 크게 증폭된다. 결국 ‘소비중독’과 ‘미래 불안’은 물질만능주의를 낳게 된다.

 

구매하라! 그러면 선택될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에 따르면 인류는 환경과의 지속적 상관관계를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과 동시에, 성 선택을 통한 짝짓기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지속시키려는 쪽으로도 진화해왔다. 즉 ‘생존’ 본능 못지않게 ‘생식’ 본능에 기반한 자기 존재의 과시를 통해 성공적인 성 선택을 도모함으로써 종족을 보전해왔다는 것이다. 성 선택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핵심 형질들(일반 지능, 개방성, 성실성, 친화성, 안정성, 외향성)의 우월성을 끊임없이 과시하려 드는 본성이 중요하단 얘기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단순한 필요나 욕망을 넘어서서 우리의 생물학적 잠재력을 구애 상대와 친구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광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끝없이 반복되어 온 ‘유혹함-유혹당함’의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소비주의 마케팅. 마케터들은 이것이 우리 안의 본능임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끝없이 유혹하고 달콤하게 독려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순히 소비주의 마케팅에 의해 소비 당하는 피해자만은 아니다. 그들 역시 눈앞에 도발적으로 펼쳐진 반짝반짝한 신제품의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는 공범자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대중은 결코 우매하지 않다. 다만 과시적 소비가 나쁜지 좋은지를 떠나 그냥 우린 이미 과시적 존재일 뿐이다. 온갖 산업이 우리의 구매 습관을 수집하고 분석해서 소비 욕구 단계에서부터 이용하려 하지만, 이것은 최근의 새로운 경향이라기보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몸에 내려온 본능을 일깨우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과도한 과시 본능이 우리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잠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짝짓기 시즌이 끝나면 과시 경쟁도 주춤해질 것인데, 마케팅은 우리의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종용한다. 죽을 때까지 연애하고, 창업하고, 여행하라고 속삭인다. 왜 우리는 저주에 빠진 분홍신을 신은 사람처럼 쓰러질 때까지 춤추도록 부추김을 당하는 것일까. 산다는 건 이토록 가혹할 정도로 소진되어야만 유지된단 말인가. 자존감 혹은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처럼 포장된 ‘과시 본능’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소비로 이를 충족하려 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회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비용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은 어쩌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거울뉴런’의 존재를 예견한 말인지도 모른다. ‘눈은 밖이 너무 궁금해서 출장 나온 뇌 일부다. 눈은 밖을 향해서만 뚫려 있어서 열심히 주변을 살피고 파악하지만 오로지 보이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라는 어느 과학자의 우스갯소리처럼 우리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점검 할 수 있다.타인이 화를 내면 내가 무언가 잘못 말했나 하고 돌아보게 되고, 타인이 행복해하며 칭찬해주면 내 행동이 올바른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모방을 통해 학습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거울 뉴런’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타인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이유도 모두 ‘거울 뉴런’ 덕분이다. 문제는 타인의 분노도 욕망도 무조건 일단 ‘거울 뉴런’에 투영되어 내 안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경조사비를 결정하는 일은 왜 매번 이토록 어려운 걸까. 옷장에 분명 멀쩡한 옷들이 걸려 있는데도 왜 매번 새로운 트렌드의옷을 사야만 하는 걸까. SNS에 올라온 맛집이나 여행지를 왜 나도 꼭 가게 되는걸까. 특정 브랜드의 패딩 점퍼를 왜 다 같이 사입게 되는걸까.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거울 뉴런’이 있어 공감 기제가 자동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처럼 무리를 지어 사회를 이루고 더불어 어우러져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발생하게 되는 소비 역시 만만치 않다.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소속감을 느끼고 타인과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사는 셈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적정선을 찾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다. 타인에게 뭔가를 베풀지 않고는 살 수 없다면 내가 이타적인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속감의 욕구에 있어 나의 불안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애써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관계는 깨지지 않을 거라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면 관련 소비는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소비주의는 인간에게 내재한 결핍감을 해소하려는 욕구, 애착에의 욕구, 자기 존재감 확인에의 욕구, 소속감의 욕구 등을 가장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처럼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번번이 소비주의 마케팅의 유혹에 넘어가서 기꺼이 우리의 시간과 돈을 투여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근본적인 욕구 충족이 아닌 공허감과 소진되어가는 통장 잔액 뿐이다.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소비가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차분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정말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돌아본다면 욕망으로 팽창된 소비는 다시 본래의 소박한 필요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박미정

박미정 님은 현재 ‘경제교육협동조합 푸른살림’에서 생활경제교육, 1:1 재무코칭 및 워크샵 등을 진행. 무작정 아끼기보다 잘 쓰기 위한 돈 관리법을 전파하고 있다. 책 <적정소비생활>과 대안적 가계부 <적정소비노트>, 1인 생활자의 돈과 감정 관리를 돕는 <이렇게 잘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번 겁니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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