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축제를 끝내야할 때

2019.10.01 | 행사/교육/공지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을 이유로 여전히 투우를 허용하고 있다.

축제의 사전적 의미는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나 축하와 제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축제를 의미하는 ‘festival’은 성일(聖日)을 뜻하는 ‘festivali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종교적 기원으로서 개인 또는 집단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 혹은 시간을 기념하는 일종의 의식을 의미한다.
축제는 경건했고, 때로는 잔인했지만 그 지향하는 바가 뚜렷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 축제가 단순히 즐거움을 얻기 위한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형태로 많이 진행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강원도 화천에서 열리는 산천어축제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화천 산천어축제는 2019년 누적 방문객 180만 명을 넘어서며 최고 흥행 축제로 자리 잡았다. 이색체험을 통한 관광객 유치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루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산천어들의 고통과 죽음 위로 쌓아 올려진 것이다.

산천어들의 고통과 죽음 위로 쌓아 올려진 것이다. 화천 지역에 자생하지 않는 산천어는 축제에 사용되기 위해 전국 각지 양식장에서 강원도 화천까지 끌려온다. 무려 약 180만 톤, 수십만 마리의 산천어들이 축제의 대박 흥행을 위해 소위 입질을 좋게 한다는 이유로 3~5일 동안 굶어야 한다. 굶주림을 견디고 나면 좁은 수조 속에 갇혀 강원도 화천까지 대이동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좁은 공간으로 인한 산소 부족과 부딪힘으로 죽는ㅜ산천어들이 생긴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번엔 수백만의 사람들이 낚시로 손으로 산천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달려든다. 산천어에게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규모 집단행동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집단의 광기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엔 머뭇머뭇하던 사람들도 사회자의 퍼포먼스와 적극적인 사람들의 모습에 동화되어간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산천어를 재미로 잡기 위해 너도나도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산천어를 두 손 높이 들고 승리의 미소를 짓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산천어를 입에 넣고 포효를 하기도 한다. 화천 산천어축제가 흥행에 성공하자 지자체들도 광기에 휩쓸려 너도나도 물고기 축제를 잇따라 개최하고 있다. 양평 메기수염축제, 강화도 송어빙어축제, 양평 빙어축제, 청평 송어빙어축제, 양주 송어축제, 안성 빙어축제, 파주 송어축제, 인제 빙어축제, 홍천강 꽁꽁축제, 봉화 은어축제 등등 수많은 축제가 생겨나고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인간의 잔혹함을 이어나가려 하고 있다. 축제라고 불리는 이것들은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계획된 학살 현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국외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투우가 있다.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멕시코 등에서 행해져 왔다. 투우라고 하면 마치 투우사와 황소가 서로 눈을 노려보다가 목숨을 건 멋진 대결이 펼쳐질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암흑 속에
가둬놓고 때로는 굶주리게 만든다. 1~2일 정도 암흑속에 갇혀 불안에 떨고 있다가 소몰이에 내몰린다.
갑자기 빛을 본 소들은 사람들과 뒤엉켜 투우장까지 영문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내달린다. 이 과정에서 매년사망자가 발생하고 소들도 무사하지 못하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투우장에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전에 여러 명의 투우사가 소를 농락하며 차례차례 등과 목에 창을, 작살을, 칼을 꽂는다. 그렇게 수만명의 환호성과 열광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투우’가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투우는 잔혹성을이유로 유럽 대부분 지방에서 금지되었지만, 스페인팜플로나에서는 전통을 이유로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 동물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인간에게도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 했다.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지만 여러 연구에서 이미 물고기도 통증을 느끼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물고기의 통증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이다. 마치 어렸을 때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뜯는 것처럼, 사람이 다른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하지 않을 때 잔인한 행동들이 이어진다. 이것은 비단 사람과 동물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을 때 여러 가지 차별과 폭력이 일어난다.

동물 학대 논란이 되는 축제들은 이를 통해 다른 생명에 대한 배려와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축제가 꼭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대량 학살’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축제의 막을 내리고, 다른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제를 시작해야 한다.

글. 임태영(녹색연합 자연생태팀 활동가)

 

이 글은 녹색희망 268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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