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가능성이다 – 가능성 읽어 내기

2011.06.20 | 행사/교육/공지

현 대통령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이의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는 패러디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고(故) 안병무선생님의 ‘너는 가능성이다(사계절출판사)’라는 책을 다시 읽으며, 「가능성을 최대한 인식하라!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과 ’했다‘라는 말은 삶과 죽음의 차이만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이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그이는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던 거야.” 그는 자신의 말에서 언급한 상황, 직업, 공간이 내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은 닫아버린 채, 자신이 경험했던 굴레만을 한정지어 생각하는 그이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 귀 멀고, 눈 먼 소통을 잊어버린 대통령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능성을 읽는다는 것은 현 상황에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읽어내는 일이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도 매우 힘들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감명을 준 책이 있습니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입니다.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에 이미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폭력을 예감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닥쳐올 폭력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폭력에 저항할, 폭력을 종식시킬 가능성을 찾아야한다는 것이 책의 핵심 내용입니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폭력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어떻게 말로써 그 가능성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성급히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단정적 표현’보다, ‘소통을 이어가며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래야만 폭력을 예감하고 두려움에 떨던 이들이 폭력에 저항하며,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내야 할까요? 내 아이일 수도 있고, 평생을 같이 할 길동무나, 직장 동료,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본주의의 한계 혹은 공포를 예감하고, 자본주의가 내 삶을 피폐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고, 시민운동․녹색운동의 한계를 예감하였으나, 그 극복방안을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채 주저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분류로 특정지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풀어가고자 하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장래를 고민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내 자신의 모습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해내야 하며, 단체 내 중요 결정 상황 속에서 주저하는 다른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스스로에게, 친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 내부에서까지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당혹해 합니다. 함께 살아오며 공감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능성의 확장을 가로막기도 하고,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시시콜콜히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가능성의 확장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과정을 밟기보다는 쉽게 실망하며 포기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믿기에 더더욱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가능성의 발견은 말로서 시작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상상력을 억제하는 단정적 표현을 쓴다거나,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거나,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존의 것(제도, 틀 등)을 떠오르게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능성을 읽어내는 이유는 현재의 한계와 공포를 뛰어넘는 대안의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소통의 과정에서 각자가 꿈꾸는 상상을 제약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상대방의 상상력을 확대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그 무엇을 만들어가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소통하세요. 그리고 서로의 상상력을 자극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꾸는 꿈이 현실이 되며,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겁쟁이의 신체를 갖는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경우,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는 겁쟁이에게 강한 비전향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두려움을 내던지고 죽음의 각오를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이기 때문에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구성해 가는 가능성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었다. 목숨을 건 투쟁은 도망자나 전향자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기한 자들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도망한 자나 전향한 자로 간주되는 겁쟁이들로부터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결기한 자들이 엿보았던 미래를 결기한 자들의 독점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로 간주되는 존재에게서 다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결기의 힘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숨을 건 행동을 포함한 겁쟁이의 연대를 생각하고 싶다.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는 그 다음 순간에 공범자가 되어 살해하는 자 쪽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을 회로로 하여 살해당하는 쪽과의 일체화가 늘 존재한다. 혹은 시체 옆에 있는 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살해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 있는 한, 아직 시체는 아니다. 그리고 시체 옆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언어행위의 임계로부터 발견해 내야 할 것은 폭력에 저항할 어떤 절박한 가능성이다. 그것도 말로서 말이다.”

– 도미야마 이치로님의 ‘폭력의 예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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