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함께 그려요

2011.08.03 | 행사/교육/공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 사회구조. 우리는 현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어느 순간 내 행동의 판단 기준도 현 사회구조가 주는 논리에 길들어 감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민단체에 후원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몇 천 원 또는 몇 백 원을 아끼기 위해 동네 서점이나 구멍가게를 이용하기보다 대형마트나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합니다. 이런 제 모습을 떠올리면,「코뮨주의-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의 다음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공동체가 생산하는 순환의 이득을 잉여가치로 변화시켜 사적으로 영유하는 것, 그것이 자본 착취의 본질이다. 자본은 항상 이런 순환의 이득을 생산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노리고 있으며, 역으로 코뮨적 관계나 활동은 항상 자본의 이런 착취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 시대를 공동체가 불가능한 시대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나요? 끊임없이 자문하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하라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사민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 등등, 기존의 틀 안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에 대해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는 두 가지 책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코뮨주의-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이진경, 그린비)」이며, 다른 하나는 「촘스키의 아나키즘(노암촘스키, 해토)」입니다.

“지배가 없는, 권위와 권력이 없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회”, 아나키즘이 꿈꾸는 사회입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지배가 없는, 권위와 권력이 없는”이라는 문구입니다. 지난 20년 녹색연합이 튼튼하게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핵심 이유 중 하낙 바로 이 부분이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지배가 없다는 것, 권위와 권력이 없다는 것이 혼란을 뜻하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아나키즘은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질서와 통치자 없는 삶 그리고 원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녹색연합이 상호존중과 합의(약속)를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해 왔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운영되어온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짧더라도 각자 20여년을 넘게 살아온 삶에서 우리는 무수한 권위와 권력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지배관계 속에 자신을 노출해 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어투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권위가, 권력이 묻어나오기도 하고, 지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는 카리스마 넘치는 권위에 기대고 싶은 이율배반적 모습을 갖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격렬히 논쟁하기도 하고, 소극적인 저항을 하기도 하면서 큰 흐름으로 지배가 없는, 권위와 권력이 없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바라는 조직문화를 녹색연합은 몸으로 깨닫고 실천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녹색연합의 경험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나키즘이 사회의 주요 흐름을 형성할 때,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를 이진경씨는 책에서 코뮨이라 부릅니다. 그이는 코뮨이 올바로 서기 위해 우리가 새롭게 바라봐야할 것들에 대해 시간에 대한 개념부터, 생산력과 생산관계에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그 이야기 모두를 구절구절 옮겨 적고,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원고 분량과 제가 파악하는 이해도가 그리 높지 않기에 오히려 왜곡된 편견을 줄 수 있다는 우려로 그러지 못한 점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야만 하는 수고가 있겠지만, 공동체를 꿈꾼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공유하고 싶은 문단들을 공유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코뮨적 존재론은 공동의 존재, 공동성의 존재론 안에도 항상 적대와 분열이, 혹은 억압이 있을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화와 평화를 꿈꾸는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코뮨적 존재론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시작해야 할 출발점임을 인정한다. 적대와 분열이 사라진 이상적 상태를 꿈꾸기보다는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그것과 냉정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좀 더 쉽게 넘어서는 방법을, 혹은 그것을 긍정적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창안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공동성의 생산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그것은 개체로서 존재한다. 공동성의 생산이 중단될 때, 그 개체화는 중단되고,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개체이기를 그친다. 공동체가 공동성을 갖는 게 아니라 공동성의 생산이 공동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성을 만들어내고 반복하여 유지하는 실천내지 작동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동성을 생산할 것인가, 어떤 공동성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 「코뮨주의-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 중에서

녹색연합의 활동에 당신의 후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