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바라는 서울의 친환경 도시상

2011.09.28 | 행사/교육/공지

박영신 전 상임대표님께서 녹색서울시민위원회가 진행한  <서울시 예산 녹색화 방안 토론회>에서 발표하신 기조 강연 내용을 올립니다.

<<시민이 바라는 서울의 친환경 도시상>>

   –어느 생태주의자의 생각 하나–

                                                             박 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녹색연합 전 상임대표)

1. 달려온 서울:

도시는 촌락을 허물어뜨린 문명의 산물이며, 오늘날의 문명은 도시의 산물이다. 이른바 ‘도시의 공기는 자유케 한다’는 그 힘과 맛을 누리고자 모두가 돌진해 온 것이다. 이것이 도시의 역사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도시, 하지만 그 도시는 괴이하다. 서울도 예외일 수 없다.  

경관으로 보면 서울처럼 아름다운 수도는 없다. 그 안에 600년의 역사 이야기를 아로새겨 삶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도시, 두드러지게 높이 솟아오른 산이 우아하게 바깥 테두리를 둘러싸고 여유롭게 흐르는 넓은 강물 줄기가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자연의 멋스러움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자연 풍경만으로 도시의 품격이 규정되지 않는다. 사회 경제의 차원과 문화가 그 도시의 됨됨이를 구성해 간다. 서울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이 한 곳에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다. 광복 때의 서울 인구는 100만도 채 되지 않던 도시이다. 그것이 전쟁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극심한 집중화 현상이 일어났다. 1965년에 350만이던 인구가 십년 뒤에는 그 배가 되고, 그 다음 십년 뒤에는 또 배로 늘어 1985년에 이르러서는 천만 명에 가까이 다가섰다.

인구의 팽창과 함께 주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익을 제공해야 하는 서울시의 적응 능력과 성장 능력 또한 놀라웠다. 천만 명의 삶터가 된 마당에 서울은 옛 모습을 지켜갈 수 없었다. 서울 그 자체가 바뀌어야 했다. 이 도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논과 밭들이 있던 땅에 거대한 주택 단지를 만들어야 했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곧은 아스팔트길로 넓혀 다져야 했고, 또 곳곳에 높다란 건물을 지어야 했다. 내친김에 한강도 손을 봐야 했다. 미역을 감던 한강 백사장 자리에 시멘트로 가공한 물 놀이터를 만들고, 산도 뭉개 각종 시설물을 세워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열과 성을 다한 개발과 발전의 증표이다.

이것은 군사 정권이 성장과 개발 이념의 깃발을 흔들면서 모두가 그 이념에 헌신한 데서 비롯되었다. 개발 이익을 부추기며 저층의 욕구를 자극하는 소리에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명했기에 개발 이념은 어느 정권이 들어섰든 예외 없이 떠받들게 될 것이었지만, 전투 행위처럼 밀어붙이는 그 동원의 방식에서 군사 정권은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하여, 서울은 성장과 개발의 이념에 발맞춰 성장과 개발의 속도전을 치르며 오늘의 거대 도시에 이른 것이다.

이제 서울은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시민으로서 함께 깊이 생각할 때를 맞고 있다.  

2. 겨냥하는 것:

거대한 변화란 문명과 문명의 만남과 부딪힘에서 일어난다. 오늘날의 변화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경제 성장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법칙으로 만들어놓은 서구 지식 체계에서 시작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근대화가 지향하는 가치는 넓고 또 깊다. 하지만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경제 가치에 초점을 맞춘 성장과 개발이었다. 바로 이 근대화를 군사 정권이 채택한 것이다.

경제 성장과 발전은 지식 체계가 제시한 법칙과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후진국은 모름지기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앞서 발전한 나라를 뒤따라야 할 모형으로 삼아 그 규격에 맞춰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뒤진 나라들 모두가 취했던 개발 전략이었다. 이 법칙과 규격에 따라 모든 나라들이 세계의 기준으로 자체의 수준을 가늠해야 했다. 국민 일인당 소득이니 국민총생산이니 또는 국내총생산과 같은 갖가지 지표가 나타났고 그 기준에 따라 자기 나라를 자리매김하였다.

이른바 근대화된 나라, 발전된 나라, 최근에 와서는 선진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 그것을 흉내 내고자 했기 때문에, 더욱 정확히 말하면 앞서간 나라의 경제 수준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했기 때문에, 모든 관심은 경제에 치우쳤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거기에 치러야 할 대가나 희생쯤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살고보자!’는 생각과 ‘잘 살아 보자!’는 것, 그것 이상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의 틀 안에 들어서 있는 만큼 이 틀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경제 개발이고 성장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녹색 이야기가 관심의 지평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서간 나라에서 벌써부터 이러한 관심을 떠올렸지만 우리나라는 여태껏 경제 성장과 개발의 틀에 갇혀 있던 터라 다른 관심이란 모두 억누르고 밀쳐냈다. 하지만 밀어닥치는 녹색 관심을 영구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계를 향한 창이 열려 있는데다 범세계화의 반열에 들어선 이상 녹색 환경의 가치로 재보려는 가치 기준을 송두리째 팽개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성장과 개발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제 새삼스런 새김질이 요청되게 된 것이다.

오늘에 와서 서울이 벤치마킹할 도시는 그렇게 많지 않고 뚜렷하지 않다. 지난날 성장과 개발의 기준에 따라 모형으로 삼을 수 있었던 도시는 많았고 그 도시의 역사 또한 짧지 않았다. 그러나 생태 환경의 녹색 가치를 귀히 여기면서 그 가치와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모범된 도시는 그렇게 많지 않고 녹색의 가치를 내세우고자 한 운동이 일어난 것도 겨우 지난 몇 십 년 전부터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경제 가치를 중심에 두고 도시들이 경쟁을 했던 시대는 마감되고, 생태의 녹색 가치를 중심에 두는, 최소한 그것에 균형을 맞추는 도시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모두 안게 된 것이다. 흔한 표현으로 모든 도시가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서울이 벤치마킹할 대도시를 찾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해야 옳다.

지난날 개발과 성장의 가치에 사로잡혀 그 밖의 다른 삶의 가능성은 아예 볼 수도 또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현대 문명의 도시는 더 이상 서울이 뒤따라야 할, 그리하여 모범으로 삼아야 할 도시는 아니게 되었다. 서울이 벤치마킹을 할 마땅한 대상이 없게 된 셈이다. 하여 서울은 이제 자체의 창조 능력을 살려야 할 외로운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이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제 서울은 더 이상 경제 성장과 개발의 가치로 다시 돌아설 수 없고 그것을 내세워 세계의 도시라고 뽐낼 수도 없다. 그것은 피폐한 지난 시대의 가치에 매몰된 구태의연한 회색 도시로 전락하여 세계의 우스갯감이 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생명의 도시 그 맛 자체를 잃어버리게 할 뿐이다. 서울은 이제껏 의심 없이 걸어왔던 그 길에서 벗어나 녹색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서울의 자긍심이 있다면 그것은 녹색 생명의 길에서 서울 스스로가 세계 대도시의 벤치마크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울은 대체에너지의 의존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되고, 에너지절약과 효율성이 가장 뛰어난 수도가 되고,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저 외곽을 둘러싼 산악의 아름다움을 어디서나 선명히 볼 수 있고, 도시 한 가운데에 흐르는 한강의 여유에 누구라도 동참할 수 있는 녹색의 수도, 복원된 생태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녹색 서울을 살리는 일은 서울의 행정 부서나 특정 정치 세력만의 책임도 아니려니와 그것의 독점 사항이 아니다. 서울을 녹색으로 살리는 그 일은 막중한 만큼 신나는 일이며, 보람된 일인 만큼 모두 동참해야 할 역사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3. 녹색 시민과 함께:

녹색 서울을 만드는 일에 기운을 북돋우는 조사가 있다. <2030 서울 도시기본계획 설문조사>(2009. 10-11/미디어리서치/서울 시민 1,550명) 결과가 그것이다. 이를 따르면, “장래 서울의 미래상”에 대하여 묻는 설문에서 여러 갈래로 응답이 나왔지만, 뭉뚱그려 말하면 50%가까이가 ‘친환경 도시’라고 답하여 친환경도시가 제 1순위이다. ‘경쟁력 도시’를 원하는 비율은 고작 38% 정도였다. 그밖에 ‘안전한 도시’, ‘역사문화 도시’, ‘약자 배려 도시’, ‘대중교통 편리한 도시’, ‘경관이 아름다운 도시’를 원한다는 의견도 나왔는데 그 각각의 기본 가치를 뜯어보면 그 모든 것이 녹색 ‘친환경 도시’라는 항목의 가치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분류할 수 있고, 나아가 ‘경쟁력’이 있는 도시를 바라는 것도 그 안을 자세히 살피면 ‘친환경 도시’라는 가치에 반드시 반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친환경 도시’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우선한다. 같은 설문에서 “서울의 발전 방향”에 대해 묻는 항목에서 ‘개발/성장 위주의 경쟁력 강화’(21.6%)에 비해 ‘삶의 질 개선’(70.6%)이 월등하게 높은 비율로 나타난 것도 시민의 가치 지향성이 지난날의 개발과 성장에 더 이상 붙박여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친환경 녹색 서울을 만드는 데 큰 희망이고 격려가 될 자료이다. 그러나 이 수치가 곧 그들이 바라는 친환경 녹색 서울을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나 실천 행위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사는 서울이 환경에 친화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 역시 개발과 성장에서 떨어질 이익 때문에 녹색 가치를 쉽게 저버릴 수도 있고, ‘이제’의 욕구 때문에 ‘올제’의 대가를 마음에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좁다란 가족의 이익과 문중과 지역의 이해관계 앞에서 친환경 녹색의 가치를 치켜세우기는커녕 깔아뭉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시 주민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며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소리를 내지른다고 해서 시민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시민은 이익 극대화의 동기로 살아가는 이기스런 소비자 곧, ‘경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없다.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힘을 모아 공동체를 위해 책임 있게 참여하지 않고는 자기의 사사로운 공간에 틀어박혀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들을 고려하지 않는 무도덕한 이기스런 인간을 ‘바보’(idiotes)라고 한 고대 희랍의 전통은 오늘의 삶에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참다운 시민은 이처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미덕으로 삼아 공공의 선을 위해 적극 참여하는 실천 행위의 주체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녹색 시민은 녹색의 가치와 생각을 마음에 새겨 공동체의 선한 삶을 위해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녹색 시민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보살핌의 책임을 잊고는 먼저 땅값을 계산하는 소비자의 마음가짐에 맞서고 그러한 경제 인간의 지배 행태에 대항한다. 녹색 시민은 자연에 대하여 어떤 이권을 요구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생태계를 지키고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살아간다.  

조직이 비대할수록 관료 행정 중심으로 치우칠 가능성은 크다. 행정 조직은 곧잘 시민 전체의 일상에서 동떨어지고 겨우 특정 이익 세력과 결탁한다. 나아가, 전문 행정 세력은 그 나름의 이익 집단이 되어 그 세력 중심의 행정 타성에 젖어든다. 서울이라고 해서 이러한 조직 경직화에서 자유롭다고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의 참여는 필수이다. 시민은 전문화의 ‘타성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이 녹색 도시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시민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참여는 정책의 최종 단계나 중간 단계에 들어서서야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 입안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갈등의 증폭 가능성을 처음부터 점검하여 막을 수 있고, 갈등의 해결 여지도 커질 것이다.

4. 말을 거는 서울:

서울은 시민과 대화코자 한다. 더 이상 스스로 지탱할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다. 마치 소비 중독에 걸린 지구인을 떠받치기에는 너무도 힘겹다며 지구가 다른 지구를 하나, 아니 둘이 더 있어야 한다고 외치듯이, 서울 하나로는 서울인을 더 이상 떠받들지 못한다고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소리는 저 요란한 빌딩 숲 사이로 쓸쓸히 빠져나가고 건설의 굉음에 짓눌려 무참히 사라지고 있다.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이 소리, 서울은 바로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있는 시민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서울 시민은 무엇으로 시민다운 품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에너지 소비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마냥 큰 자동차로 도시를 질주하는 것을 즐기려 하고, 나아가 그것을 문화 취향이고 선택이라며 자기중심의 삶을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할 것인가? 소비의 수준이 곧 문화의 수준이라며 천박한 소비 수준으로 자기 모습을 자랑해 보일 것인가? 서울이 기어코 즐비한 고층 건물의 숲을 만들어 세계 도시와 경쟁하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한강변의 개발을 서둘러 세계 유명 도시가 되겠다고 계속 우길 것인가?

아니면, 녹색의 잣대로 소비 그 자체가 자연을 훼손한다고 여겨 소비문화를 곧 문화로 생각하는 도시 주민의 관행을 질문하고, 그것을 차라리 문화의 왜곡과 추함이라고 여기어 오늘의 자기 모습을 재인식하고 문화의 지배 개념을 재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대체 에너지 의존율에서, 자동차 이용자 수가 낮다는 것으로, 걸어서 아니면 대중교통 수단으로 누구나 평화롭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녹색 도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녹색 시민은 서울의 자연과 함께, 그 자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과 이웃과 더불어 말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에서 일어난 산사태가 인재라 하고 천재라 하는 말싸움에 끼어들기보다는 녹색 시민은 인간의 겸허를 말하면서 그 산 가까이에 파고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산에서 떨어져 산의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자고 서로 부추긴다. 적어도 녹색 서울을 그리는 녹색 시민은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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